수기공모 역대수상작

2018 | 나의 신랑은 황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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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랑은 황금신

 

HAN XIULAN

88서울올림픽 당시 저는 용정에서 윤동주 시인이 다녔던 대성중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비록 국교수립 전이었지만 조상의 나라 한국에서 처음 개최되는 올림픽에 중국의 조선족들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올림픽개막일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개막식을 보라고 수업을 일찍 끝내고 귀가조치를 하였습니다. 학교에서 가까운 친구네 집에 모여서 개막식을 보면서 벅차오르는 감격을 느꼈던 기억이 30년이 지난 지금도 새록새록 합니다. 어린 소녀가 처음 한국이란 나라를 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빠른 속도로 한국드라마, 한국노래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한국의 문화나 패션을 동경했고 20대의 젊은 시절을 함께 하였습니다.

제가 실제로 한국 사람들과 접한 것은 96년도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입니다. 지금은 적어도 석사학위가 없으면 대학교에서 강의를 맡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제가 다닌 일본어학과의 경우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교 교단에서 강의하는 일이 가능했습니다. 저한테 모교에 남아 전임으로 채용되는 행운이 차려졌습니다. 모교에 강의를 나가면서 학교 수업이 없을 때는 밖에 나가 언어학원에서 성인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은 대학교수를 하면서 시간이 되면 다른 일을 허용하였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당시 수강생 중 여행사관계자가 계셨는데 저에게 방학 기간에 가이드를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중고등학교 선생님들도 하시는 분들이 많고 대학교 국문학과나 일문학과 교수들도 많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97년 7월에 일본어 여행가이드로서의 첫 발작을 내디디었습니다. 한국의 관광통역안내사는 자격증이 언어별로 구분되지만, 당시 연변의 가이드는 가이드 자격증에 언어 구분은 없었습니다. 연변이라는 지역특성상 일본 손님보다 압도적으로 한국 손님이 많다 보니 7:3의 비율로 한국 손님을 더 많이 안내하였습니다. 3년간 여름방학에 가이드를 하면서 제가 한국인에 대해 느꼈던 가장 큰 인상은 역시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이었습니다. 매번 2박 3일의 여행이 끝날 때면 이렇게 정이 들까 싶을 정도로 헤어지기 섭섭해지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나잇대 분들도 드라마에서 보던 사람들처럼 세련되었는데 어떤 분들은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화장품이며 귀걸이, 옷까지 챙겨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가이드선물을 못 챙겨 와서 미안하다고 나중에 부쳐주신다며 주소를 알아가지고 가셔서 가방이며 옷, 문구 등을 보내주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당시 어떤 선배 가이드가 한국 손님이 한국에 초청하겠다, 뭘 보내주겠다. 이런 말들을 자기는 수없이 들었다면서 저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국적을 불문하고 신용성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이 있겠지만 제가 만난 한국 사람들에 대해 저는 별로 나쁜 기억이 없는데 아마 이것도 저의 복인 것 같습니다. 저에게 한국에 오면 꼭 찾아오라고 말씀하셨던 분들도 계셨고 한국유학은 생각이 없냐고 물어보신 분들도 계셨지만, 그 당시 저는 한국유학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전공이 일본어이고 앞으로 계속 대학교에서 정교수까지 되려면 꼭 석사공부나 박사공부를 해야 했는데 그 공부를 일본에 나가 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99년에 저의 일본유학이 결정되고 외할머니가 점쟁이를 찾아가 저의 일본행에 대해 여쭤봤다고 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는 제가 장손녀다 보니 남다른 사랑을 저에게 주신 분입니다. 손녀가 가는 길이 걱정되는 마음에서였겠죠. 근데 그 점쟁이가 저는 일본도 좋지만 한국이 훨씬 더 좋다고 하셨답니다. 당시 중국에서 일본에 나가는 절차가 아주 어려웠는데 이미 비자까지 받은 상황이라 그냥 웃고 넘겼습니다.

일본에 유학 가서 매일매일 공부에 아르바이트에 정신없이 보냈고 대학교에 강의를 나가면서 그렇게 13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일본에서 5년간 국립대학에서 석, 박사 공부를 하면서 5년간 장학금을 받았으니 운이 아주 좋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일본어를 조금 잘 한다고 해도 친척 한 명 없는 이국타향에서 그것도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에서 20대 중반의 여자애가 외로움과 두려움에 힘들었던 시간도 많았습니다. 가끔 속으로 한국으로 유학 갔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신의 선택에 후회할 틈도 없이 하루하루 바쁘게 살았습니다.

일본을 떠나게 된 계기는 연로하신 어머니가 결혼도 못 하고 혼자 지내는 딸 걱정을 많이 하셨고 특히 동일본대지진 이후 어머니의 불안감이 더욱 심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본으로 떠날 때 어머니가 꼭 같은 민족과 결혼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는데 그런 약속을 강조한 본인을 많이 원망하셨습니다. 꼭 그런 약속 때문에 제가 혼자인 건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혼자라 뭐든지 결정을 내리기가 쉬웠습니다. 결국 동일본대지진이 있고 일년 뒤 저는 아쉬움도 많았지만 미련 없이 일본을 떠났습니다. 일본을 떠나기로 함과 동시에 저는 한국행을 선택하였습니다. 당시 후보지는 중국의 대도시와 연길 그리고 한국이었는데 세 곳 중에서 한국에 가장 오고 싶었습니다. 고향에 가면 가장 편하겠지만, 외국에 오래 살던 사람은 결국 작은 연길보다 대도시에 가버리는 경우가 많고 북경이나 상해 같은 대도시도 좋지만, 음식도 입맛에 맞고 풍토습관도 비슷한 한국으로 결정했습니다.

2012년 5월, 일본을 떠나 2개월 만에 저는 서울 하늘 아래에 있었습니다. 길가에는 철쭉꽃이 예쁘게 반겨주고 일본에서 비싸서 자주 못 사먹던 애호박과 깻잎도 실컷 먹고 일본에서는 냄새 때문에 눈치 보느라 주말에만 먹던 파나 마늘, 부추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트에서 파는 된장이나 고추장은 제 입맛에 딱 맞았고 여태 본적 없는 다양한 쌈 채소로 쌈 싸먹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역시 한국에 오길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족이라면 색안경을 걸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서운함도 느꼈고 전반적으로 90년도 후반에 가이드하면서 느꼈던 정 많은 한국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여행에 오셔서 여유를 즐기는 마음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도 시간의 촉박함에 쫓기고 삶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의 애국심은 정말 존경스럽고 감탄스러웠습니다. 보통 애국심은 해외에 나가면 생긴다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똘똘 뭉쳐있는 것 같습니다. 길에서 달리는 차들은 국산 차가 많고 가전제품도 휴대폰도 거의 한국제품입니다. 생각해보면 중국에서 어머니가 사용하는 세탁기는 일본브랜드이고 냉장고는 독일브랜드이고 샤워기는 한국브랜드입니다. 저는 일본에서 세탁기는 중국브랜드를, 냉장고는 한국브랜드를 사용하였습니다. 반면에 한국은 거의 국내제품이 독점상태로 아마도 작은 나라이기에 내수시장이 중요하고 그만큼 국민들이 자국 제품을 사랑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아주 오래전 점쟁이가 말했던 한국에 가면 일본보다 더 좋다고 했던 그 운이 과연 사실일까요? 한국에 오자마자 반년 뒤에 대학교수로 일자리를 찾았고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작년에 저도 운명의 사람을 만나 결혼도 했습니다. 저보다 3살 어린 한국인 신랑은 로맨틱하고 자상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짚신 아닌 황금신입니다. 신랑과 결혼식 전후로 총 3번의 잊지 못할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세 번의 여행을 모두 신랑이 기획했고 각각 테마가 정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나서 자란 중국에 다녀오는 “뿌리를 찾아서”입니다. 고향 집터를 둘러보고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돌아보는 여행이었습니다. 두 번째 신혼여행의 테마는 “아름다운 금수강산”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5년 살면서 별로 다니지 못했다고 신랑이 신혼 여행지를 국내로 정해서 제주에서 2박, 남해에서 1박, 강원도에서 2박으로 정성껏 코스를 짰습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유네스코 유산에 관동팔경, 그리고 동해의 해돋이는 사진으로는 다 담기 어려운 웅장함과 멋스러움을 가슴에 새겨주었습니다. 세 번째는 저의 일본에서의 유학 생활의 추억을 신랑도 공유하고 싶다는 이유로 “처음처럼”을 테마로 다녀왔습니다. 제가 살던 집 3곳, 아르바이트하던 곳, 다니던 학교와 마트, 식당 등등 저 혼자만의 추억에 살포시 신랑과의 추억을 추가했습니다. 일본에서 교수님도 만나고 일본인 친구도 만났는데 가는 곳을 듣더니 다들 부동산투어를 왔냐면서 신랑을 데리고 유명한 관광지에도 다녀오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결혼 전의 저는 맨날 개미처럼 살면서 봄에 꽃놀이도 일부러 못갈 때가 많았고 대충 한번 다녀오면 충분했는데 결혼 후 처음 맞는 이 봄, 신랑과 꽃구경도 세 번 다녀왔습니다. 실력이 없으면서 모든 요리는 눈대중으로 대충해왔는데 정석으로 배워보라는 신랑의 말 한마디에 요즘은 생각지도 못했던 한식 요리교실에 재미를 들이고 다니는 중입니다. 신랑을 만나서 못해본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한데 신랑은 저를 만나서 중국과 일본여행은 평생 통역이 필요 없어서 좋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몇 십년동안 살아온 환경이 다르므로 습관, 문화의 차이는 당연히 존재할 거라 생각됩니다. 두 사람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인정하고 차이를 좁혀가는 노력을 한다면 연애할 때처럼 알콩달콩 잘 살아 갈 거라 믿습니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앞으로 50년을 잘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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