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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한국에서 찾은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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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찾은 행복

김명숙

우리는 재혼한 부부다. 남편은 한국의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일하고있었는데 나에겐 4살난 딸애가 있었다. 무던하고 착해 피줄은 아니더라도 딸애를 꼭 잘키워줄것이라고 믿음이 갔다. 나는 오로지 딸애만 잘키워준다면 모든게 오케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가정위기는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남편이 한국에서 아침 출장길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엄중한 차사고를 당해 3천만원의 빚까지 걸머지게 되었다. 남편은 두달간 병원신세를 져서야 쌍지팽이를 짚고 집에 왔다. 갑자기 들이닥친 경제적인 몰락과 예기치도 못한 불행에 당혹하기만 했다. 워낙 우리 부부는 튼튼한 감정기초도 없는데다가 남편은 거의 한국에 가있다보니 정도 없고 그동안 집에 생활비도 넉넉하게 주지 않아 남편이 미워 다툼은 심해만 갔다. 심지어 이혼소리도 점차 자주 오르내렸다.

설상가상으로 중학교 1학년에 다니는 딸이 행운스럽게 미국에 가서 세계올림픽경기에 참가할 영예를 취득했다. 기쁜 일이지만 마음한구석엔 근심이 슬금슬금 똬리를 틀고 앉았다. 500만의 거액은 자부담해야 했던것이다. 빚더미에 눌리워 숨쉬기도 바쁜데다 남편이 쌍지팽이신세가 되어 수입도 없으니 막막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말없던 남편은 결단을 내렸다. 지팽이 신세로 완쾌되지 못한 몸으로 다시 한국 건설현장으로 가서 인츰 딸애의 500만 미국경비를 꿔서 보내왔다. 후에야 알았는데 그때 남편이 일하고있던 아파트 건설현장의 윤태중이란 소장님이 도왔단다. 물론 나이가 어리지만 성격이 칼이고 일처리가 대범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말이라면 토를 달지 않는단다. 지팽이를 짚고 간 남편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기가 막혀 이건 아니라고 다들 반대하더란다. 윤소장님은 인츰 화를 내며 누군들 힘들고 막막할때가 없고 얼마나 사정이 딱했으면 저런 몸으로 일하러 왔겠는가고 하면서 일하게 더는 군소리 말라고 으름장을 놓아 간신히 일하게 되었고 돈도 바쁘다니 500만원을 꿔줬던 것이다.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눈물나게 고마운 귀인이였다.

남편이 무척 고마웠다, 그런 상황에서도 친자식도 아닌 딸애를 위해 그정도로 해주니 지난 일은 따지지 않고 다시 마음을 잡고 열심히 가정을 가꿔가리라 마음 먹었다.

남편을 보내고 나도 생각던 끝에 한국행을 다짐했다. 경제위기는 남편혼자 감당하기 너무 힘든 것이다. 나에겐 낯설은 한국이여서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남편이 일하는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찾아갔지만 내가 그 힘든 일을 할수 있을지 근심이 태산같았다. 남편은 건설현장에서 교포지만 그래도 직영반장일을 맡고 있었다. 억지로 태연함을 갖췄지만 처음으로 건설현장에 발을 들여놓자니 마음이 두근닥거리고 사람들이 작달막한 내모습을 보고 무슨 일을 하겠냐고 비웃는 것 같아 안절부절 못했다.

남편이 소개를 하니 뜻밖에도 누구나 열정적으로 례의를 갖춰 대해주는게 어리둥절했다. 어줍게 서있는 나에게 안전모랑 이것저것 갖춰주어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다. 뿐만아니라 현장에 소장, 대리, 부장까지도 모두 한국인들인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첫인상이지만 한국도 살만한 곳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에 많은 교포들은 오래전부터 한국으로 드나들며 돈도 적잖게 벌고 선진국이여서 모든 것이 편하게 되있어 한국생활에 매료되여 심지어 한국에서 나머지 인생을 살아가려고 한다.

일이 서툴다고 짤릴가봐 하루종일 열심히 일하고나니 퇴근할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팔도 쑤셔나고 엉치가 물앉는 느낌이 들었다.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면서도 남편이 힘드냐고 물어도 자존심이 작동하여 그냥 할만하다고 얼버무렸다. 한국까지 와서 한푼이라도 많이 벌어 산더미같은 빚도 허물어버리고 잘살아보고싶은 욕심에 죽을둥살둥 일했다. 내가 힘들어도 열심히 일하니 모두들 칭찬했다. 직영으로 일하고 계시는 이유선아저씨는 회식할 때 이렇게 일잘하는 여자는 여태 2,3십년을 현장 다녔어도 처음 봤다고 남편한테 나를 매일 업고 다녀야 한다고 말씀하셔서 한바탕 웃었다. 다른 아저씨들도 처음에 내가 삽질하는 것을 보니 빠르고 아주 능숙한 솜씨여서 어디서 많이 하다 왔구나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해본다니 믿지 않았다고 하면서 확실히 일솜씨 잽싸다고 칭찬해주셨다. 얼어있던 마음이 점차 녹아내렸다.

그러던 어느날, 끝내 내가 한번은 만나보고 싶었던 우리집에 큰 방조를 줬다던 귀인인 윤소장님을 만나보게 되었다. 현장을 옮겨 일하게 되었는데 윤소장님이 관리하는 현장이었다. 첫날 가서 일을 한참 하다나니 윤소장님이 오셔서 나한테 아주 례절스럽게 인사까지 건늬는데 워낙 천성이 뚝한 나는 마음은 뻔하지만 고마움 표시도 못하고 그저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일만 했다. 슬그머니 눈여겨보니 남편이 그렇게 믿을만할만큼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생김새도 미남이면서도 어딘가 듬직하고 확실함이 엿보였다. 듣건데 젊은 사람이 지금은 혼자 건설회사를 차리려고 시작중이란데 꼭 크게 성공하리라는 믿음이 갔다. 남편이 한국에서 여태 가정을 위해 해놓은 것이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윤소장님같은 훌륭한 분의 믿음을 얻은게 제일 큰 성과라고 생각했다.

윤소장님은 빚 많이 진걸로 아는데 이젠 다 갚았냐고 관심해주면서 중국에서 한국까지 와서 고생하는데 많이 벌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고 돈벌 기회만 있으면 기회를 주었다. 내가 장화를 신고 못을 뽑다가 못에 찔렸을때도 안전규칙을 지키지 않고 안전화를 신지 않아 생긴 일임에도 호된 욕은커녕 치료비까지 대주면서 안전화 없으면 또 사줄테니 아까워 말고 위험하니 며칠전에 사준 안전화를 신으라고 웃으며 권고했다. 관심에 마음이 훈훈해났다. 윤소장님이 고맙고 든든했다.

지금은 윤소장님이 맡은 현장마다 해체정리에다가 직영일까지 아주 유리한 도급형식으로 맡겨주어 다른 도급 팀장들은 상상도 못할만큼 모험이라곤 없이 돈을 번다. 물론 여러 현장 다니며 몸은 바쁘긴 하지만 마음은 즐겁고 꿈이 부풀어오른다. 윤소장님이 우리를 믿어주고 기회를 줄수록 열심히 했다. 한국에서 행운스럽게 평생 고마운 귀인을 만났는데 우리가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너무나 못난 인간이 아닌가 싶다.

한국에 와서 제일 고마운 분이 윤소장님이지만 그뿐이 아니다. 원청 대리는 내가 땡볕에서 일하니 손수 그늘을 쳐주어 한해여름 더운 고생을 많이 덜수 있었다. 전차장님은 무더운 여름에 내가 밖에서 땀흘리며 일하는게 안쓰러워 시원하게 얼음커피를 타서 자주 가져다주군 했다. 윤소장님의 고향 후배인 배재문과장님은 30대인데 더구나 웃음이 나올정도다. 어떤 용역이 너무 일도 하지 않고 다른 용역들을 무시하면서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하기에 내가 여자답지 않게 나서서 몇마디 다투다가 한국에까지 와서 남편한테도 그렇고 더구나 윤소장님께 시끄러움을 가져다주는거 같아 몇마디 하고 돌아서서 일하는데 배과장님이 우리 주위에 나타나 흘끔흘끔 보며 돌다가 지나갔다. 조금 있다나니 남편도 지게차를 부리나케 속도를 내여 몰고오더니 세워놓고 우리를 지켜보았다. 알고보니 한창 다툴 때 배과장님이 꼭대기층에 올라갔다가 내가 다투는걸 보고 인츰 남편한테 전화해 형수님이 용역하고 다투고 있으니 빨리 가서 때려엎어놓자고 꼭대기에서 급히 뛰여내려왔단다. 부끄럽고 황당했다. 거의 남자들인 건설현장에서 다투기까지 한걸 들키다니 한편으로는 창피하기도 했지만 가슴 깊은곳에선 흐뭇함이 일렁거렸다. 원청 최과장님도 겨울에 춥다고 좋은 옷과 신발도 가져다주었고 그뿐만아니라 낯모를 사람들도 내가 무거운 쓰레게 주머니를 옮기는걸 보면 말없이 훌 들어 가는 걸음에 쓰레기상자에 버려주었다. 용역 아저씨들도 같이 일을 하면 내가 무거운걸 들세라 와서 빼앗아 도맡아하군 한다.

한번은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잃어버려 양촌파출소에 신고를 했는데 어떤분이 파출소로 가져다주어 되찾게 된 일도 있다. 그렇게 고마운분에게 연럭처를 남기지 않아 감사의 인사마저 할 기회도 없었다. 인정이 메말라가고있는 세월이라지만 나는 선한 마음에서 이는 훈훈한 열풍속에서 따뜻한 행복이 가슴에 촉촉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감정에도 크나큰 변화가 일어났다. 서로의 요해도 없이 무가내로 살아왔던 우리는 같이 일하면서 서로의 결점은 이해하게 되고 많은 우점들을 발견하게 되어 관계에 큰 개선을 가져왔다. 이제야 진정한 가족의 단란함과 행복을 맛본 것 같다.

외국에서 일한다면 거의 고통, 슬픔, 불안함, 외로움이 마음에 자리를 꽉 채워 힘들게 보내는게 보편적이라고 생각되는것인데 나는 처음엔 겁을 먹고 불안함에 떨며 왔지만 한국의 따뜻한 온기와 향기에 갈수록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고 주저심이 확신감으로, 불안함이 평안으로, 허전함이 뿌듯함으로, 바뀌여 자신감이 넘쳐 내 인생에도 아름다운 선율이 잔잔하게 흐른다.

내가 한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선택한 일자리가 아파트 건설현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 일터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내가 여지껏 상상도 못했던 완미한 행복을 찾았다. 땀을 흘리면서라도 힘들고 안일함을 떠나서 인간관계에서 풍기는 편안함속에서 내가 즐기는 일을 하며 유쾌하게 보낼수만 있다면 이것이 최고의 선택인거 같다.

잘살아보겠다는 욕망으로 한국으로 온 우리에게 크나큰 도움과 관심을 주어 행복을 찾게 이끌어준 윤태중소장님, 배재문과장님,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찾아준 낯모를 사람을 비롯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그만큼 열심히 사는 모습으로 인생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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