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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미미의 연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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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의 연주회

 

유리문 너머로 미미가 드럼을 치는 모습이 보인다. 손과 발을 다 움직여야 하는 드럼은 단시간에 배우기 어려운 악기다. 그런데 미미의 드럼 연주 실력은 빠르게 늘고 있다.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연습으로 보내기 때문일 것이다.

실용음악학원에서 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외국인이 등록한 것은 미미가 처음이었다. 집에만 있는 미미를 남편이 우리 학원으로 억지로 데려왔다. 고향이 그립고 말 통하는 사람이 없어 우울한 마음을 악기 연주로 풀기를 바란다고 했다. 피아노든, 드럼이든 원하는 것을 배우라고 하자 미미는 턱짓으로 드럼을 가리켰다.

드럼 강의를 맡고 있던 나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미미는 한국말을 거의하지 못했다. 나 역시 중국어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짧은 영어와 몸짓을 섞어 겨우겨우 수업을 진행했다.

그래도 다행히 미미는 드럼을 좋아했다. 연주라기 보단 소음에 가까울 정도로 세게 드럼을 치고 나면 얼굴이 한결 편안해보였다. 이제 스물 셋인 미미의 마음엔 무엇이 그렇게도 응어리져있을까? 마음속에 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드럼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만 집중했다.

오전에 학원에 와서 저녁에 남편이 데리러 올 때까지 드럼을 치고 싶어 하는 미미를 위해 나는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강사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자고 아무리 불러도 미미는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 많은 곳이 불편하다고 했다.

내가 싸온 도시락을 조심스럽게 깨작거리던 미미는 다음날부터 본인의 도시락도 챙겨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우리는 손짓발짓으로 자신이 가져온 반찬을 설명하며 서로에게 권했다. 향이 강하고 기름진 중국식 두부반찬을 먹은 내 표정이 묘해지자 처음으로 미미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미미를 보면 남편의 직장을 따라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2년 정도 살았을 때가 떠올랐다. 경상도 토박이인 내 말투는 어디서나 이목을 끌었다. 은행에서도 시장에서도 다들 여기 사람 아니지 않느냐고 한 마디씩 했다. 인사말을 여러 번 시키거나, 지역의 방언을 경상도 말로 바꿔보라는 사람도 많았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 작은 관심과 호기심이라 생각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도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심정에는 상처가 되었다. 높고 빠른 내 억양을 반복해서 흉내 내는 택시기사 아저씨 때문에 눈물을 쏟은 적도 있었다.

같은 대한민국 땅에서도 그런 일을 겪는데 미미는 오죽할까. 늘 주눅 들어 있는 미미의 그늘진 얼굴 뒤에는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을 닫고, 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 하지 않는 미미에게 드럼이라도 위로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미미의 연주 실력이 어느 정도 늘었을 때 즈음, 나는 미미에게 학원에서 정기적으로 여는 연주회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미미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그간 연습 많이 했는데 무대에서 연주하고, 가족도 초대하면 보람 있고 즐거울 거라고 미미를 설득했다.

미미는 올 사람도 없고, 남들이 보는데서 연주하는 것도 싫다고 했다. 한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데 미미의 남편이 학원으로 들어섰다. 미미의 남편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미미와 중국어를 섞어 한참 대화를 나누었다. 언뜻 들리는 말을 종합해보면 시어머니를 초대하자고 하는 것 같았다. 도리질을 치던 미미가 끝내 울기 시작했다.

스무 살에 시집온 미미는 여전히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이라고 생각하는 시어머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했다. 시어머니는 한국어도 모르는 미미에게 여러 가지 규칙을 만들어 강압적으로 지키게 하셨다. 특히 남편을 휘두를까봐 남자를 존중하기 위해 만들어진 규칙들이 미미를 힘들게 했다.

결국, 겸상조차 못하고 남편을 왕처럼 받들어야 하는 생활을 견디다 못한 미미는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마을 전체가 한 집처럼 지내는 시골 마을의 문화도 이방인인 미미에겐 버거운 짐이었다. 꼬챙이처럼 마른 미미는 혼자 남겨지면 자해를 했다.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남편은 시부모님과 떨어진 곳으로 부랴부랴 분가를 했다.

남편은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미미가 자신감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미미를 설득했다. 나도 미미에게 뭔가에 도전하고, 성공하는 경험이 미미 자신에게 큰 기쁨과 성취감을 줄 거라고 거들었다. 원래 음악은 여러 사람과 나눌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거라는 내 말에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부터 미미는 더 열심히 드럼을 쳤다. 학원 연습실 유리 너머로 연습하는 모습만 봐도 미미가 얼마나 진지한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미미가 마음을 돌린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연주회를 동영상으로 찍어 CD로 만들기 때문에 중국에 있는 부모님에게도 보낼 수 있다는 말에 미미는 눈을 반짝였다.

타국에 딸을 보내고 걱정이 태산일 부모님을 위해 미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에 몰두했다. 드디어 연주회 날, 미미는 긴장한 얼굴로 몇 번이고 드럼스틱을 고쳐 잡았다. 시스템을 설치하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나는 그런 미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때, 갑자기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한 무리의 어르신들이 꽃다발을 들고 맨 앞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큰소리로 미미를 불렀다. 시부모님 뿐 아니라 마을 어르신들이 모두 오신 것 같았다. 과일을 담는 박스를 포개어 만든 플랜카드에는 과수원 며느리 화이팅, 과수원 아기 잘해라 등의 응원의 말이 구불구불하게 적혀 있었다.

미미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르신들이 저마다 가져다주시는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받아들었다. 그 먼 길을 오셨음에도 한 분도 불편한 기색 없이 모두들 힘껏 응원을 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내 눈가가 더워졌다. 미미도 뭔가를 느낀 것 같았다. 다정하게 표현할 줄 모르는 어르신들이었지만 내심 미미를 아끼고 계신 듯 했다.

연주회가 시작되자, 미미는 떨리는 중국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미리 중국어 인사말을 한국어로 번역해둔 종이를 따라 읽었다. 그러자 마을 어르신들이 무대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박수를 치셨다.

연주회가 끝나자, 미미 곁으로 어르신 두 분이 쭈뼛쭈뼛 다가오셨다. 미미의 시부모님이신 듯 했다. 시어머님이 하도 꼭 쥐고 계신 바람에 모양이 흐트러진 청심환을 미미에게 내미셨다. 앉아 있는 내 가슴이 다 떨리던데 어떻게 표정도 안 바뀌고 큰 통을 잘 치냐는 투박한 칭찬에 미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미미의 남편이 큰 통이 아니라 드럼이라고 따라해 보라며 분위기를 띄우자, 시부모님이 어색하게 드-럼 하고 따라하셨다. 나는 단란해 보이는 가족에게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미미는 사진을 찍는 내게 입모양으로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자신의 아이를 보러온 학부모님들은 꽃다발에서 꽃을 나누어 미미에게 건넸다. 말도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이렇게 연주회를 했냐고, 대단하다는 말에 미미는 조금씩 미소를 지었다. 알아듣진 못해도 표정과 분위기로 자신을 인정해주는 한국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미미는 시부모님과, 또 한국과 화해를 했다. 퉁명스러운 표현 안에 감춰져 있던 진심이 통하자 그 간의 오해가 풀린 것이다. 미미는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민 시부모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점차 한국도 좋아졌다고 했다.

연주회 영상을 보신 미미의 부모님께선 이제 마음이 놓인다고, 언젠가 미미의 연주를 보러 한국에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고 한다. 그 때를 위해 미미는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잘 지내는 것을 포기하고 입을 닫아버렸던 그녀의 놀라운 도전에 나 역시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 평짜리 연습실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미미에게 꿈이 생겼다. 한국어와 연주 실력이 늘면 다문화 가정 아이들에게 드럼을 가르치고 싶다고 한다. 드럼을 통해 다시 자신을 다시 사랑하고, 한국을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는 미미의 다음 연주회가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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