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공모 역대수상작

2018 | 내생애 봄날

페이지 정보

조회71회 댓글0건

<내 생애 봄 날>

 

1. 나의 두 번째 고향 대한민국에서의 시작

처음 내가 한국에 왔을 때, 교회에서 4개월 동안 살았다. 지금의 나의 남편을 만나기 바로 전까지도... 16년 전, 생각지도 못한 나의 멋진 남편을 만나 그와 결혼하여 그의 집에 살게 되면서 나는 시아버님, 시어머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귀중한 보물인 세 아이와 함께... 신혼때 처음 한국 음식을 접하게 되었는데 필리핀 음식과는 너무 다른 매운 맛 때문에 쉽게 먹지 못했다. 읍내와 많이 떨어져 있는 시골이였고, 베트남 음식 파는 곳이 어디인지 몰랐다. 점점 삐쩍 말라 먹을 것이 없던 나는 살기 위해서 매운음식을 먹었어야 했고, 점차 한국음식에 익숙해져갔고, 이제는 김치 없으면 못 먹을 정도로 한국인 입맛이 다 된 것 같다.

시아버님, 시어머님과 함께 농사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내가 하던 일은 땅콩, 콩, 고구마, 깨, 고추 등.. 채소 농사였다. 처음 해보았던 한국 재배 농사는 나에게 신기하고도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새벽별보고 농사일을 시작하면 허리 한번 세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준비를 해야만 했다. 첫째 아이 출산이 임박했을 때도 농사일을 해야만 했고, 출산을 하고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을때도 아이를 등에 업고 또 밭에서 일을 지속하였다. 고춧대 그늘에 포대기를 깔고 아이를 놀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이는엄마의 보살핌이 부족했던 탓에 자주 울었고, 그 울음소리에 나는 숨죽여 울 수 밖에 없었다. 밤낮으로 일을 하던 내 몸은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우리집은 아이들과 먹고 살아야 했기에 아픈 몸을 이끌고 일을 하러 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지쳐가던 나의 몸 만큼 필리핀에 있을 나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만 갔고, 엄마가 너무 그리웠다.

아이들이 자라서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잘 지내는 듯 했으나, ‘얼굴이 까맣다고, 엄마가 필리핀 사람이다’고 놀리는 친구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여 매일 울며 집에 들어오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놀리는 친구들에게 제대로 된 말 한마디 못해주는 나는 엄마로서 미안한 마음에 아이를 안고 펑펑 같이 울었다.

 

2. 시부모님 부양, 아르바이트 하면서 아팠던 기억

나를 많이 아껴주시던 시아버님은 둘째 아이 돌잔치 때 돌아가셨다. 늘 남편보다 친할아버지를 잘 따랐었고, 아이들이 아플 때 병원도 같이 다니던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더욱 힘이 들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님도 몸이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럴때마다 24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갔다. 시어머님은 가면 갈수록 몸이 수척해졌고 걸어 다니는 날보다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았다. 결국 시어머님은 입원을 하게 되었고 남편은 시어머님의 건강 상태를 좋아지게 하기 위해서 요양보호사를 불러 매일 같이 시어머님의 건강을 살폈다. 요양보호사가 오기 전에는 혼자 시어머님을 도맡아 돌봐야 했기 때문에 힘이 들었는데 도움을 받아 훨씬 수월했다. 3년 뒤 나는 셋째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3살이 되어서야 일을 할 수 있었다. 친구의 소개로 가게 된 첫 직장은 빵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아르바이트였지만 돈을 벌고 아이들에게 맛있는 것을 많이 사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일단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기서 내가 맡은 일은 빵 하나하나 포장하는 일이었다. 나 이외에 필리핀 언니들이 많이 있어, 즐겁게 일을 할 수 가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하였으나 4년 후 공장은 폐업하게 되었고 아르바이트였던 나는 얼마 벌지도 못하고 다른 직장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도 읍내에 있는 아이스크림 공장에 들어갔다.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미처 공장 내부 환경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필리핀에서 온 나는 추위를 너무 탔었고, 아이스크림 공장은 너무 춥고 너무나 힘이 들어 내 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많이 아파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아이 셋을 키우기엔 경제적으로 역부족이었던 나는 다시 새로운 일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바로 그 곳은 자전거 부품 공장이었다. 하지만 이 곳에서도 4개월 밖에 일을 할 수 없었다. 급하게 나는 새로운 일을 찾아야만 했고 가까운 곳에 있는 병원을 자주 들르곤 했다.

 

3. 한국어 소통

16년째 나는 한국에 살게 되면서 많은 한국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마다 한국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은 바로 나의 몸이 아파 병원을 가게 되면서부터이다. 친구의 소개로 광주에 있는 병원을 다니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가게 된 병원은 낯선 한국어로 가득했고 진료를 봐주던 의사선생님의 상담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가득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약을 4주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도저히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나의 심정은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득했고 절박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면사무소에 아이 유치원에 필요한 서류를 내야 할 기간이 왔다. 혼자 가게 된 나는 무척이나 떨렸고 그로 인해 한국말을 잘 말하지 못하고 알아 듣지 못해서 또 한 번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한국어를 배워야 겠다는 의지가 커져만 갔다. 그래서 나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한국어 강좌를 참여했다. 나와 같은 다문화 여성들이 열정적으로 강좌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어 배움의 의지가 차올랐다.

4. 다문화센터를 만나게 됨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우연히 받게 된 친구의 한 통의 전화 “따르릉~” 찰칵 “여보세요?” “나원아! 너 군청에서 하는 다문화 일에 관심 있어?”라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 나는 합격하지 못 할거라는 걱정과 달리 운이 좋게도 면접에 합격하게 되었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휴식을 취하면서 건강을 되찾았고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같은 환경에 놓여있는 다문화 여성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고민도 나누고 정보를 공유하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봉사는 나와 같은 다문화 여성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지역 내의 경로당에 계신 할머니들의 말벗이 되어주고 안마도 해주는 봉사였다. 미소를 띄우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보니 보람을 느꼈다. 그리고 공동 육아 나눔방에서 다문화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를 하기도 하였다. 나의 아이들과 비슷한 다문화 아이들을 돌보는 봉사는 훨씬 수월하고 보람찼다. 많은 일을 배웠고 행사에 참여했지만 가장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201 8년 설날 때, 한국의 전통 한복 입기 행사였다. 필리핀의 전통의상과는 다른 의복은 나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예절도 배우게 됐는데 한국의 전통 인사법을 배우게 되었다. 처음 해 본 한국 전통 인사법은 어려웠지만 또 하나의 새로움의 문이 열렸다.

 

5. 앞으로의 봄날을 위하여

때마침 집 앞에 봄을 알리는 예쁜 벚꽃이 피었다. 그 꽃을 보며 앞으로의 나의 한국생활의 봄날이 그만큼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바란다. 나는 소중한 나의 세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행복한 나날이 캔버스의 그림처럼 채워졌으면 좋겠다. 지금도 나는 끊임없이 한국 요리를 배우고 있다. 그건 바로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그리고 남편과 함께 맛있는 한국 음식을 먹기 위해서이다. 한국에서 잊을 수 없었던 가장 좋은 추억은 화순 국화꽃 축제를 간 것이다. 아이들을 돌보고 일을 하느라 지친 나에게 큰 활력소가 되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우리 가족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가 힘을 내고 서로 의지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으면 좋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