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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손과 나침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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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과 나침반

 

당시 스물한 살이었던 저는 재수를 하여 입학한 학교를 반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휴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하지 않았던 재수와 모종의 사정으로 인한 휴학은 저에게 있어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하고 싶었던 일도, 미래를 위한 결심도 무기한으로 미뤄져 버렸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마치 나침반을 잃은 배처럼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는 채로 방황하던 저는 그저 유흥비를 벌기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공단지역 바로 옆의 자그마한 카페였습니다. 손님도 거의 없고, 편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기에 지원하게 됐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손님들의 응대를 제외하면 핸드폰을 만지거나 멍하니 바깥을 쳐다보는 게 일과였습니다. 며칠간은 그런 일과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죠. 핸드폰도 재미가 없어지고, 바깥은 매연으로 뿌연 하늘에 매일 같은 시간마다 지나다니는 트럭 몇 대가 전부일 뿐 사람은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 때 뭐라도 했다면 좋았을 테지만 아무런 목적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던 저는 그저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만을 기다리며 무의미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첫 월급을 받고 점점 이 일과에 익숙해졌을 무렵, 제 일상에 아주 작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언제나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봐도 방금 작업을 마치고 온 사람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 손님이라고는 대부분 사업차 방문한 사람이나 공단의 높아 보이는 사람들 뿐, 공단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제가 일하는 동안 처음이었습니다.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그는 항상 같은 행동을 했는데, 그 행동이란 카페에서 가장 싼 음료인 1500원 짜리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는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마감시간까지 책을 펴고 공부하는 것 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선한 광경에 흥미가 생긴 것도 잠시일 뿐 어느새 그조차도 제 지루한 일과에 녹아들었습니다. 그냥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차림에, 같은 행동을 하는 외국인 손님이 되었죠. 그렇게 저의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상이 계속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작은 변화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한지 두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제가 카페에 출근하고 겨우 몇 분이 흘렀을 때 잔뜩 껴 있던 비구름에서 드디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쏟아지고 잠시 후, 저는 열심히 빗물을 쏟아내는 비구름처럼 바빠졌습니다. 많아야 열 명도 채 안되던 손님이 오늘따라 붐비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항상 적은 손님에 혼자 가게를 보던 터라 말도 안 되게 바빠졌고 손님들이 자리를 대부분 차지하고 나서야 저는 녹초가 된 채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제야 저는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겼고 카페 앞에서 서성이는 어떤 사람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머뭇머뭇 유리창 너머로 카페 안을 연신 살피고 있었고, 그를 따라 저도 카페 안을 살폈습니다. 그제야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그가 평소 애용하던 구석자리는커녕 앉을 자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만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저는 그를 불러들여 카운터 바로 옆 빈 공간에 자리를 만들어 줬습니다. 수리중인 2인용의 작은 탁자였지만 그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듯이 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해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직원과 손님의 공간을 구분하기 위한 낮은 벽을 두고 한 쪽에서는 공부를 다른 한 쪽에서는 의미 없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는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북적이던 손님이 하나 둘 씩 돌아가고 어느덧 카페에는 그와 저만 남게 됐습니다. 한바탕 쏟아지던 비도 언제 내렸냐는 듯 그쳐있었습니다. 손님들이 떠들던 소리와 빗소리가 사라지자 카페 안에는 적막이 흘렀습니다. 항상 틀어놓는 대중음악만이 카페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적막함을 고조 시키는 듯 했습니다. 또 한 가지 고조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사각사각 들려오는 연필 소리였습니다. 핸드폰에 집중해도 귓가에 맴도는 연필 소리는 오히려 조금 크게 틀어놓은 음악보다 선명하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의 신경은 저도 모르게 온통 그 소리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사각거리던 소리가 멈췄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었던 저는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보았습니다. 그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연필을 내려놓았던 것 이였습니다. 그 탓에 눈이마주쳐 서로 멋쩍게 웃었습니다. 저는 이때다 싶어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조금 무례했던 게 아닌가하고 생각하게 됐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약간은 서투른 말투로 답해주었습니다.

그는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근로자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어떤 사정으로 기숙사에서는 공부하기가 힘들어 근무지 주변에서 공부할만한 곳을 찾다가 한적한 이곳에 오게 됐다고 했습니다. 그 외에도 자신에게는 아홉 명이나 되는 가족이 있으며 나이 어린 동생들은 부모님과 함께 고향에 있고, 위로 하나뿐인 형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말해주었습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처음으로 그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해진 낡은 가방, 몇 번을 펼쳐 봤을지 모를 낡은 책과 공책, 아끼고 아껴 쓴 듯한 몽당연필... 힘든 타국 생활에서도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어 연필을 놓지 않고 있다는 그를 보며 알 수 없는 뭔가가 느껴졌습니다. 계산을 하며 자주 봐왔던 그 손의 굳은살이 더욱더 크고 굳건하게 보였고, 온갖 먼지로 하얘진 그의 열 손가락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습니다.

잠깐의 대화가 끝나고, 다시금 그의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흘러나오는 음악을 껐고, 카페에는 듣기 좋은 사각거림이 울려 퍼졌습니다. 비가 와서 먼지가 가라앉았는지, 아니면 그날따라 유독 하늘이 맑았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맑게 갠 밤하늘을 보니 망가졌던 나침반이 고쳐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때의 경험이 제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됐는지, 그 때 무엇을 느꼈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무기력해지고, 힘이 들 때 그의 멋진 손과 그 손이 연필로 연주했던 기분 좋은 선율을 떠올리면 조금이나마 힘이 났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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