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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 우물 안 개구리, 알고 보니 우물이 나의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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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알고 보니 우물이 나의 세상이었다

 

1부 –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이 사는 시골, 장흥에서 시작된 국제연애

 

더 큰 세상을 경험하고 성장하기 위해 서울로 떠났던 나. 매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 가방에 대학 원서 책들을 꾸깃 꾸깃 넣어 전철로 뛰어가 나 자신을 전철에 꾸겨 넣는 삶을 3년 정도 살았을 즈음, 내 몸은 많이 지쳤다.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아 서울로 떠나왔던 삶에 회의를 느낄 즘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휴학계를 신청하고 고향인 전라남도 장흥으로 한 학기 내려가 쉬기로 결정했다. 내려가서 몸과 마음 편하게 책도 읽고 등산도 하고 버스, 지하철 안 타고 온전히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나의 세상으로 돌아가 쉬고자 했다. 6개월 뒤엔 미국 산타바바라로 교환학생을 1년 나갈 예정이었다. 서울보다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고향에 내려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아침에 닭이 울고 새가 짖고 닭이 꼬끼오 우는 소리에 아침을 시작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20살이 되기 전까지 장흥은 나에게 “우물”이란 상징이었다. 늘 서울이 궁금했고, 알지도 못하면서 도시에 사는 친구들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느낌을 받았고 늘 부러웠다. 그래서 시골의 느린 삶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원어민 교사로 일하고 있는 캐나다 친구 Emily가 외국인들 사교 모임에 나를 초대했다. 사교 모임의 이름은 자그마치 “장강(JangGang ; 장흥, 강진의 앞 글자)”이었다. 그들이 그 모임을 발음할 땐 “지앙갱”으로 들렸다. 나잇대도, 국적도, 성향도 다양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었다. 각기 다양한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주제로 이야기하든 신선했고 재밌었다. 그 무리 중 한 명인 Tim은 내게 그 다음 날 페이스북 메신저로 “가비야, 너 스코틀랜드, 영국, 웨일즈, 아일랜드 이렇게 4개가 어떻게 다른 줄 알아?” 하며 동영상을 첨부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보지도 않았다. 그 다음 날 Tim은 내게 체스를 하자고 했다. 만나서 체스를 하다가 체스를 처음 하는 사람치곤 내가 잘 하자 경쟁심을 느꼈는지 너무 진지해진 Tim 때문에 분위기는 어색해졌다. 이런 모든 신호들이, 지금 돌아보니 Tim이 나에게 보내는 관심의 표현이었다. 우리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예정대로 나는 미국으로 1년간 떠나게 되었고, 우리의 장거리 연애는 시작되었다. Tim은 내 고향 장흥, 강진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을 했고 나는 캘리포니아 태양 아래 바다를 느끼며 공부를 했다. 누군가가 모든 나라의 모든 도시들 중 내게 가장 의미 있고 가장 큰 세상이 어디였냐는 질문을 했다. 늘 나의 “우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은 작은 시골에서 나의 세계, 나의 인생의 짝꿍을 만났다. 늘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곳에서 정말로 필요한 시점에 휴식을 했고, 내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만났다. 우물 안 개구리인 나에게, 알고 보니 우물이 나의 세상이었다.

 

2부 – 내가 이 남자와 결혼을 결심한 순간들

 

한 번은 크게 싸우고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영어로 왜 설명을 해야 하는지” 그것마저 화가 나는 상황이었다. 왜 화났는지는 말해야겠고, 내가 말하고 싶은 문장을 영어로 또 바꾸기도 해야 했고 내 머릿속은 복잡하면서 멍했다. 싸우다가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이상한 정체불명의 소리를 지껄이는 내 모습이 참 처량해 보이는 날이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내 평생 이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고 이것에 대해 짝꿍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랬더니 짝꿍이 망치로 한대 맞은 얼굴로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고 언어의 불공평성에 대해 자각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 후엔 싸울 때 각자 이야기를, 각자 입장을 말할 때 나는 한국말로 후련하게 (짝꿍이 이해하든 못하든) 할 말 다 쏟아내고 다시 영어로 차근차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바뀌고 나서 내가 한국말로 화를 막 쏟아내는 동안 분명 팀도 화가 났고 서로 감정적이었을지라도, 팀이 서툴지만 또박 또박 “나 그것을 몰라. 나 한국말 빨리 배워야 해. 다시 영어로 말해줘 제발”이라고 말하면 금세 화가 나고 격앙되었던 나의 감정은 양치질 후 나의 입 안처럼 뻥 뚫리는 느낌이 든다. 그 순간마다, 결혼을 결심했고 그렇게 작년 후지산 정상에서 약혼을 했다. 물론 프로포즈할 때 Tim은 한국어로 또박 또박 내게 고백을 했다.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 되어 허리가 굽고 너가 더 많이 짜증을 내도 ‘딤플 사랑해 짜증내지마’라고 말 할거야. 나랑 결혼해줄래?” 지금은 어느덧 한국에 온지도 4년차, 그리고 이제는 삶의 터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북한산을 등산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내려오는 사람마다 Tim은 인사를 건넸다. 외국인이 한국말로 인사를 먼저 건네니 내려오시는 등산객들이 참 좋아하셨다. 그리고 식당에 가면 늘 한국어로 또박 또박 주문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며칠 전에 택시 기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본인이 가지고 있던 케잌을 기사님께 감사하다며 드리고 내렸다. 이런 Tim을 보며, 우리는 서양인처럼 생긴 사람들이 다가오면 한국말을 쓰지 않고 영어로 대화하려고 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이 곳 대.한.민.국에서. 내가 미국에 교환학생 공부를 하러 갔을 때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한국어로 커피를 주문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영어가 아무리 세계 공용어라지만 우리의 과잉 친절 덕분에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도 좌절감을 느끼고 영어권 국가에서 오지 않은 외국인들에게 소외감과 차별을 느끼도록 하지 않나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3부 – 교육이라는 키워드로 하나 된 한국인 가비, 영국인 Tim

 

나는 중등 교사 영어 과목 임용을 준비하는 학생이다. Tim은 충북대학교 원어민 교수이다. 우리 모두 영어에, 더 크게는 교육에 관심이 많다. 듀이에서부터 프레이리까지 동일한 책을 읽고 영국과 한국의 교육 시스템을 비교하고 토론한다. 이때는 연인이라기보다는 동료의 느낌이 더 강하다. 나는 주로 한국 교육을 비판하지만, Tim은 영국 교육을 비판한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 균형 잡힌 교육에 관한 견해를 가지게 된다. Tim의 2년간 전라남도 강진에서 원어민 교사로서의 생활과 충북대학교에서 시간은 그에게 교육의 중대한 의미를 깨닫게 해줬고 더불어 많은 질문들을 남겼다. 우리 자신의 아이들이 성장할 세상인 대한민국에서 조금 더 “아이들을 존중”하고, “아이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각자의 길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체적인 한 사람을 만드는 교육에 이바지 하고 싶다는 게 그의 꿈이 되었다. 더 이상 원어민 교사, 교수로서의 입장이 아닌 자식의 아버지의 입장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년 9월 Tim은 하버드 대학교 교육학 석사에 지원했다. 그의 학업계획서는 한국에서 교사로서의 삶이, 한국인 약혼자를 만나 그의 삶이 어떻게 자신을 성장시켰고 왜 한국에 다시 돌아와 한국 교육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마침내 이번 해 3월 초에 그는 합격하였다. 이는 모두 대한민국 강진에서부터 시작하여 청주에 이르기까지 발판이 되어준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도전이었고 결심이었다. 나는 영어 교사로서, Tim은 아이들을 존중하고 자율성을 기르는 교육 활동가로서 우리가 고향이라 부르는 한국에 조금이나마 작은 기여를 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이다. 4년 전 한국에 올 때 비행기 안에서 처음으로 김치를 맛봤던 그는 매일 아침 김치를 먹고, 모든 음식에 쌈장을 곁들여 먹는 사람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Tim에게도 전라남도는 우물이 아닌 배움을 향한, 더 큰 삶을 위한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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