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기공모 역대수상작

2018 | 아름다운 한국의 생활

페이지 정보

조회8회 댓글0건

아름다운 한국의 생활

 

지금 나와 아들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한국에서 근심 걱정 없이 병원 다니고 학교 다니며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있다. 처음부터 이렇게 행복한건 아니었다.

 

8년 전 겨울 업무상으로 처음 한국에 출장 왔다가 아담하고 교통 편리하고 문명한 이 나라에 반하여 애 아빠가 살고 있는 한국에 정착을 결심했다.

바로 중국으로 들어가 아들 필요한 서류를 작성해 비자를 받았다.

그때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망설이던 중이라 어린 아들 손을 잡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현실은 예산보다 최악 이였다. 남편의 내연녀는 매일 아침 안방까지 찾아와 헤 여 지지 못하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2년 후 데리러 오마하고 한국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아들을 놔두고 그 집에서 나왔다.

혼자 병원에 가서 자궁수술을 하고 남동생 집에서 몸조리를 했다. 급한 마음에 일을 금방 시작해 하루 네 시간 잠 자가며 밤낮으로 설쳤다.

 

어언간 3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갔고 나는 반 지하 전세로 이사했다, 너무 행복했고 아들을 데려 올수 잇다는 마음에 엄청 들떠 있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그 이튿날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에 가니 왼쪽유방에 의심 물체가 있다고 한다. 역한 냄새가 나고 찐한 액체가 흘렀지만 매번 사우나찜질방에서 만나는 아들을 하루 빨리 데려올 욕심에 진통제를 복용하며 버텨왔는데 결국 문제가 생겼다.

금방 전세보증금에 모든 돈을 다 모아 넣고 손에 돈 한 푼 없고 보험 없이 큰 병원은 상상을 못했다, 이 사정을 아신 사장님이 사대보험과 현금 백만 원을 주시며 편하게 수술을 잘 받고 오라 하신다.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보름이 지나 바로 출근을 했다, 1키로가 넘는 곱창구이 판은 무겁고 힘들었지만 고마움에 열심히 뛰 여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왼팔이 힘을 쓰지 못하고 통증이 가해졌다,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하던 담당 의사님이 당황해 하시며 조직검사를 다시 해야 한단다.

불길한 예감이 스며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 결과 재수술날짜 맞추라고 한다.

화가 나서 미칠 지경 이였지만 일단 치료를 해야 하니 여성병원으로 옮겼다.

그런데 수술을 하는 중에 수술이 중단 됐다, 유방암이 확산돼 대학병원으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핑핑 돌고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잦은 수술로 친척이나 친구들 한데도 더 이상 도움을 청 할 수 없었고 전신 마취 공포에 만약에라도 수술대에서 내려오지 못하면 아들하고 있을 시간이 더 부족 할 수 있겠다는 마음에 수술을 포기하기로 했다.

또 한 번 사장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미셨다, 퇴직금에 봉급을 넉넉히 주시고 보험도 건강 되찾을 때까지 계속 내 주신다구 하신다.

수술 전에 나는 아들 보러 가지 않았다, 그 얼굴을 생각하며 어떻게든 살아서 나와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는 기적같이 눈을 떴다.

나를 기다린 건 살아났다는 기쁨만이 있는 건 아니 엇다, 어마어마한 수술비가 떡 하니 숨을 막히게 했다.

병문안 오는 지인 분들의 5만 10만 20만 다 합해도 턱없이 부족했다.

난 몇날 며칠 잠을 자지 못하고 정처 없이 병실복도를 걸어 다녔다,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돈을 빌려야 할지 머릿속에는 그 생각 뿐 이였다.

나의 불안 증세를 세심한 간호사님이 알아채시고 주치교수님께 말씀드렸다.

주치교수님이 진단서와 소견서를 떼여주시면서 환우들의 조언대로 구청, 동사무소 보건소를 찾아가보라 하신다. 정부에서 부양자가 없는 환자를 모른다고 할 수 없을 꺼 라 구

나는 염치불문하고 각 부문을 휩쓸며 사정을 했다.

그러는 동안 가슴에 상처를 내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국에 세금을 얼마나 냈다고 혜택을 달라고 하냐고, 그렇지만 따뜻한 분도 계셨다, 힘내시고 조금만 기다려 라 구 .

얼마 지나 난 기초수급자가 되었고 의료비도 많이 삭감됐다.

그 뒤로 16번의 항암치료가 시작 됐다, 면역력이 너무 낮아 자주 무 감 균 실에 배치되어 뼈가 부서질 정도로 소름 끼치는 주사를 맞고 두 번씩 가공한 호일에 쌓인 음식을 먹으면 오장육부가 비틀어지게 구토를 해댔다.

모든 세포와 혈관이 터지는 거 같았고 며칠사이에 검은 머리가 다 없어져 버리고 반짝반짝 대머리로 변했다, 얼마 먹지 않는데도 소화를 못하고 손발톱이 새까맣게 변해갔다,

매번 항암제가 몸으로 들어가면 난 의식마저 잃었다, 그건 지옥 그 자체였다.

겨우 항암치료를 마치고 30번의 방사선치료가 시작됐다.

차츰차츰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살가죽이 구운 돼지가죽마냥 수십 번 벗겨지고 얇은 천이 부위에 조금만 스쳐도 아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입맛은 점점 잃어가고 온 몸이 부어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병원 갈 때 마다 차비가 아까워 자전거 타고 다녔는데 후에는 숨 쉬는 것 마저 힘들어졌다.

동네 살고 계시는 인심 후한 어르신들은 브라지도 하지 않고 민머리에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나를 보시면 “아기 엄마 힘 내! 엄마는 어린 거 놔두고 정신 줄 놓으면 안 되는 겨”라고 하시며 맛 잇고 십기 쉬운 음식을 가져다 주셨다, 이 뿌리가 흔들려서 먹기가 쉽지 않았다.

아들도 중학교 들어서면서 내 곁으로 데려 왔다, 다행이나마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아들 심리상담을 해주셨다, 어린 나이에 충격이 너무 커서 가끔 이상한 증상이 있었다.

상담선생님 덕분에 난생처음 캠핑에 갈 기회도 생겼는데 많은 사람들과 같이 움직이기엔 무리였다, 이 상황을 아신 유명한 교수님이 자가용으로 그 먼 길을 태우고 휴게소에 들려 맛있는 감자도 사주시며 몸이 힘들지 않게 알뜰히 챙겨주셨다.

재밌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많은 덕담과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셨다.

사랑과 배려, 나눔의 즐거움,

 

그 후로 나는 적극적으로 봉사하러 다닌다,

출입국에서 외국인들 예약방문도 도와 드리고 서류 통번역, 질서 관리도 한다.

그리고 여러 단체에 옷 기부도 연결해드려 많은 분들에게 나눔의 행복을 준다.

만약에 그 고마운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나는 없을 것이다,

남은 인생을 더 열심히 노력하면서 나처럼 외롭고 지친 분들과 끊임없는 사랑으로 같이 살아가련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