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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수상작 ]

국경을 넘어, 문화를 비비다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6-05-19 (목) 16:03 조회 : 1810
“엄마가 일본사람이 아니였으면 좋겠어”
 우리 첫째 아들이 6살 때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더니 한 말이다.
 그 달의 학습주제가 독도였고, 어린이집에서 매일 독도의 자연,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 독도노래를 배우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집에 오면 독도노래를 신나게 부르는 아들에 모습을 자주 보곤 했다.
 나는 일본사람으로서 독도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가만히 있거나, 피하는 편이였다. 역사적인 문제에 관한 화제가 나오면 항상 내가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어 불편했고, 모두 과거에 있던 사실들이기 때문에 일본 사람으로써 당연히 미안해해야 하고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표현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래도 요즘은 옛날처럼 일본을 아주 적대시하기보다, 좋은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져서 평소에는 내가 일본사람이라는 걸 느끼지 못하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6살밖에 안된 아들이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들으니 눈가에 눈물이 빙 돌았다. 왜 그렇게 생각 하냐고 물었더니 ‘일본사람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이유가 더 충격적이다. 순간 당황한 나는 아들에게 어떠한 해명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어린이집이 갑자기 원망스러워졌다. 좋은 것만 가르쳐도 충분한 나이에 이웃나라에 대한 적대심을 심어줄 필요까지 있는가. 애국심을 가르치는 것은 좋지만 다른 나라에 대한 나쁜 감정까지 가르칠 필요는 없지 않는가. 언젠가는 겪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일이 이렇게 빨리 나에게 닥칠 줄이야...
 그 날 저녁, 남편이 퇴근하고, 오늘의 충격적인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남편이 아들에게
 “도윤아, 독도는 한국 땅도 아니고 일본 땅도 아니야. 우리 지구촌의 땅이지”
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랬다. 내가 아는 한국과 일본다문화가정에서는 평소에는 사이가 좋다가도 한일문제만 되면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여 부부싸움이 되는 집을 여러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이에게 말을 해주는 남편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남편도 한일감정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한국과 일본,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남편이 참 존경스러웠다. 나는 아들한테 그 얘기를 듣고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했는데, 남편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 중학교 때 와서 중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한국에서 다녔기 때문에 스스로 ‘나는 한국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에 속상해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걸 보니, 아직 멀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 아들이 3학년이 되어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지만, 다행히 그 이후로 큰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 학교에서는 엄마가 일본사람인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워하며, 누가 안 물어봐도 먼저 말하고 다닐 정도이다. 사춘기가 오면 어떻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이왕 한국과 일본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었으니 우리가 한국과 일본의 다리 역할이 되어 주변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나를 만난 애기엄마들은 외국인을 이렇게 가까이 사귀는 건 처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생각이 결정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니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반면 내가 잘하면 ‘일본도 나쁘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심어줄 수 있기에 아주 의미 있는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요즘같이 한일관계가 안 좋을 때, 그래도 개개인이 만나 좋은 교류를 하다보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좋아지지 않을까. 풀뿌리외교라는 말도 있듯이, 아주 작은 뿌리지만 모아지면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에 남편이 ‘결혼이민자와 함께 사는 한국인’ 수기공모에 응모했을 때, 이런 글을 썼었다. 한국은 비빔밥의 나라라서 카레도 비비고 팥빙수도 비벼먹는데 일본사람인 아내는 카레도 팥빙수도 안 비벼먹는다고. 그런데 몇 년을 함께 살다 보니 지금은 본인은 오히려 카레를 안 비벼먹게 되었는데 아내는 비벼먹게 되었다고...
 함께 서로의 문화를 비빔밥에 비벼먹듯이 섞어서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화도 비비고, 서로의 생각도 비벼가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잘못하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 수도 있지만, 잘하면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이 넓은 지구촌을 살아가는 세계인으로서 큰 시야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 아이들도 꼭 그렇게 자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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