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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수상작 ]

나의 좌충우돌 도전은 계속된다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6-05-19 (목) 15:36 조회 : 2042
 차가운 동장군이 물러가자 햇살이 눈부시고 바람도 따뜻한 완연한 봄기운이 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나도 새로운 도전을 위해 날개 짓을 하고 있다.
  저의 이름은 김은숙이고 중국에서 온지 14년이 넘었다. 한국국적을 취득했고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 초등학교 5학년인 딸, 그리고 18개월 된 막둥이와 남편, 나 이렇게 다섯 식구가 오붓하게 살고 있다.
  한국으로 시집을 오기로 결정한 그 날부터 나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인연이란 알 수 없는 것이 꿈에서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한국에서 일하던 이모의 소개로 남편을 사진으로 처음 보게 되었다. 그 후 전화통화도 하고 편지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서 남편의 정직함과 성실성을 믿고 나는 25살에 한국행을 택했다.
  결혼초기에는 한국생활의 모든 것이 나에게 새롭기도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힘들었다. 전자제품 사용부터 길 익히기, 아파트 동 호수 찾기 등등 일상생활 자체가 과제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힘든 것이 의사소통 그리고 외로움이었다.
  나는 조선족이여서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한국에 와보니 외래어 사용이 많아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았다. 한번은 남편과 파마하러 미용실에 갔는데 “어서 오세요, 어떤 헤어스타일을 원하세요?” ‘헤어스타일이 무슨 말이지?’ 내가 남편을 바라보았더니 “어떤 머리모양을 원하냐고 물어보는거야.” 나는 “굵은 거로 파마를 말아주세요.” 라고 했다. 그런데 미용사가 “머리결이 좀 푸석하네요. 나중에 메니큐어하러 한번 오세요.” 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네.” 라고 그냥 대답했다. 끝나고 미용사가 “샴푸 해드릴게요.”라고 해서 나는 다시 남편을 보았고 남편은 머리를 감으러 가라고 알려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파마는 했지만 그 후로는 혼자서 외출하기가 무서워졌다.
  내가 살던 곳을 떠나 낯선 한국에 와 말 붙일 사람 하나 없는데 남편은 직업상 격일근무여서 하루는 혼자서 보내야 했다. 낮은 그럭저럭 지나갔지만 밤이면 ‘내가 왜 이 낯선 땅에 왔을까?’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다시 돌아갈까?’ 별별 생각이 다 들며 무섭기도 하고 외로움과 혼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는 무기력함에 눈물로 보낸 날이 많았다. 하지만 이 길은 내가 택한 것인데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이대로 포기하기엔 부모님께도 죄송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다문화센터가 있었는지도 몰랐고 무엇부터 시작해야하나 갈팡질팡하며 혼란을 겪는데 뜻밖에 임신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외로움에 힘들어 하는 내게 새 생명을 선물로 주신 거라 받아들이며 임신, 유아관련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고 모르는 것은 남편에게 물어보고 해 본적도 없던 컴퓨터도 검색하는 법부터 하나씩 배워나갔다. 아기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무조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또래아이 엄마들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말 떼기가 어렵지 한번 시작하면 아이 키우는 고충을 서로 알기에 친해지기가 수월했고 내가 중국에서 와서 이해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더니 다들 너무 친절하게 설명도 해주고 여러 가지로 배려해주어 정말 고마웠다.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이 더 많아 살만하다고 깨닫게 해준 그 때 만난 언니들이 지금은 각자 일들이 있어 가끔 연락을 하며 조언을 받는다. 이처럼 고마운 이웃이 있었기에 어려움 많던 한국에서의 생활을 극복할 수 있었다.
  두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자 나는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려면 엄마인 내가 한국 교육에 대해 알아야 할 것 같다고 남편에게 말했더니 검정고시를 보라고 했다. 나는 검정고시에 대해 알아보고 초등학교과정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초등과정은 혼자 힘으로 했는데 중학과정에는 영어가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다니던 중학교에는 일본어를 배워 영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기에 EBS 무료강의를 들으며 ABC부터 시작했다. 낮에는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며 틈틈이 공부했고 가족들이 잠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열심히 공부했다. 늘 곁에서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남편은 시험일에는 항상 시험장까지 같이 가주었고 애들도 “엄마, 시험 잘 봐. 화이팅!” 하며 응원해준 덕에 1년6개월 만에 고졸까지 합격했다. 나의 학업에 대한 갈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문과에 입학하여 장학금을 받으며 졸업을 1년 앞두고 있다. 가난하여 중국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학업을 한국에 와서 다시 할 수 있었음은 제게 가슴 벅찬 기쁨이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2012년에는 홍천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중국어 통번역지원사를 모집한다고 하여 지원서를 냈으며 시험에 통과하고 면접을 거쳐 일을 하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하는 출근, 기대와 긴장 속에 업무 익히랴, 복사기 사용법 배우랴, 전화 받으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어느덧 시간은 흘러 차츰 센터 업무에 적응해나가게 되었다. 또한 중국결혼이민자들이 겪은 문화적 차이의 어려움과 외롭고 불안한 이민생활의 고충을 들어주고 적응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고 의사소통이 안 되는 분들에게 통역도 해줄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했다.  
  일하면서 한국어능력시험6급도 취득했고 다문화강사 교육도 받았다. 다문화이해교육을 나갔을 때 있었던 일이다. 중국어로 내 소개부터 하고 중국에 대한 소개를 한국어로 했는데 만들기 체험을 하기 위해 책상주위에 동그랗게 모인 아이들이 “선생님, 중국사람 맞아요? 왜 한국말을 잘 해요? 한국 사람이죠?” 라고 묻는 것이다. 나는 “중국 사람인지, 한국 사람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한 아이가 “잘 모르겠어요. 우리 반에도 엄마가 중국인인 애, 베트남인 애가 있긴 한데 우린 그냥 친구예요. 그래도 궁금해요.” “그래. 어느 나라 사람이든 지금 이 곳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나는 한국국적이고 한국에 살고 있으니 한국 사람이지 않니?” “그러게요. 어쨌든 중국어도 잘 하고 한국어도 잘 해서 좋겠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순간 저는 그동안 겪었던 어려움 보다는 이 아이들 생각처럼 두 나라의 말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에 뿌듯했다.
  사실 내가 한국어를 열심히 한 이유 중 하나가 아이들이 학교에 갔을 때 엄마가 한국인이 아니라고 따돌림을 당하거나 무시할까 두렵기도 했고 아이들의 선생님과 만나 상담을 할 때 소통의 어려움은 없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중국에서 온 엄마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어느 날 딸에게  “민지야, 너는 엄마가 중국에서 왔다고 애들한테 말하면 너랑 놀아주지 않을까봐  무섭지 않니?” 라고 묻자 딸이 “ 아니, 애들한테 우리 엄마 중국에서 와서 중국어 엄청 잘 한다고 자랑했는데.” 라고 하여 가슴이 뭉클하며 너무 고맙고 대견스러웠다. 아이들의 순수함에서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며 외국인이라고 차별한다며 불평만 하지 말고 좀 더 당당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리라고 다짐했다.
  다문화센터에서 일을 하면서 저는 자신감도 많이 생겼고 구체적 꿈을 가지게 되었다. 가족 같은 동료들, 많은 배움의 기회를 열어준 센터가 너무 감사했고 이곳이 더 많은 결혼이민자들이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드는데 도움을 받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일을 한참 재미있어 할 쯤 10년 만에 셋째가 생겼다. 기뻐서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넌 애 둘이나 잘 키우지 뭐 하러 또 애를 가져. 애들 키우다가 세월 다가겠네.” 라고 해 서운했는데 남편마저“나도 기쁘기는 하지만 어떻게 키워야 하나 걱정도 되네. 솔직히 오년정도 더 하고 직장 그만두려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힘드네. ” 라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아요. 당신 오년만 더 하고 그만둬요. 내가 일하면 되지.”라고 했지만 서운함은 어쩔 수 없었다.
  엄마도 그 사람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요즘 같은 저 출산 시대에 애 많이 낳는 것도 애국이라던데 이 또한 얼마나 기쁜 일인가!’ 라는 생각과 처음 한국에 와서 힘들고 외로워 돌아가고 싶었지만 우리 아이들이 생기며 나에게 많은 용기와 힘이 되었던 걸 기억하며 내게 또 다른 의미의 선물일거라 믿고 이 나라의 큰 일꾼으로 키우고 싶다. 사람은 살면서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생긴다.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그래서 더 기대되고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지금은 일을 그만두고 육아를 하고 있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통번역을 공부해 더 넓은 곳에서 이민자들을 위해 일하는 직업을 갖고 싶다.
 저의 도전이 무모할 수도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일이 생길 거라 믿는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게는 눈부신 미래가 있어.’ 라는 노랫말처럼  희망이 있어 도전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어 삶이 더 즐겁다.
이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은 더욱더 그렇다. 서로 돕고 이해하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외국이든 내국이든 서로 편견을 버리고 배려하며 다함께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야 한다. 나 또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원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할 것이고 새로운 도전도 계속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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