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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수상작 ]

평범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6-05-19 (목) 15:22 조회 : 1865

저는 20대 초반에 아이 하나를 낳고 7년의 모진 결혼생활을 정리했습니다. 시댁의 부당한 대우는 참을 수 있었지만 전남편의 폭력과 외도는 참을 수 없어 결국 아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친정도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공장과 식당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20대 꽃다운 나이,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은 대학생이었지만 저는 한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엄마였습니다. 생계를 위해 찾은 식당과 공장에서는 사람들은 제에게 얼마나 부모 말을 안 들었으며 젊은 나이에 쯧쯧!”하며 혀를 찼습니다. 사람들의 편견과 멸시 때문에 힘든 날도 많았지만 한 아이를 책임진 엄마인 저는 직장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무시와 멸시를 모른척하며 손발이 부르트도록 열심히 일했습니다. 돈을 조금 모아 친정집에서 아들과 독립하여 작은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저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믿습니다. 친정도 가난하여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들과 살아가기 위해 온힘을 다해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저를 안타깝게 생각한 친구가 어느 날 자기가 일하는 한의원에서 일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20121월 친구의 도움으로 한의원에 간호조무사로 출근하게 되었습니다. 그 한의원 원장님은 학벌도 경력도 없는 저에게 일자리를 주셨습니다.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열심히 배웠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한의원에 입사한지 3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발목이 삔 외국인이 한의원에 찾아왔습니다. 원장님이 침을 놓기 전에 그는 저에게 침이 많이 아프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덩치가 산만한 남자가 그렇게 묻는 것이 귀엽기도 하고, 아픈 그를 안심시킬 필요가 있어서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며칠 동안 한의원에 찾아와 치료를 받았던 그와 저는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외국인은 스리랑카 사람이고 현재는 제 남편이자 우리 아이들의 아빠입니다. 그 사람은 한국어를 아주 잘했습니다. 부산아시안게임 때 한국에 왔고, 공장에도 다니다가 스리랑카로 돌아가 한국에 유학을 와서 한국어를 공부했고 지금은 다시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외국인과 한 번도 말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비자가 없다는 것이 문제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그를 사랑하고 결혼하기까지 저의 결심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결혼이고, 아들도 있어서 재혼 결심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는 정말 유쾌하고 저에게 좋은 남자였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온 제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남자였고, 저에게 힘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에게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아들이 외국인을 아빠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었습니다. 아들과 남포동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아들은 그를 좋아했습니다. 아빠의 정을 모르고 자란 아들은 그 사람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어, 엄마라고 저에게 귓속말로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데이트는 아들과 셋이 함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2013822, 그날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같이 절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 곳에서 저에게 반지를 주며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비싼 반지는 아니지만 저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라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남들처럼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바라던 평범한 삶을 살게 되어서 너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열심히 일했고, 아들과 셋이서 남들처럼 외식도하고, 해운대와 경주로 가족여행도 갔습니다. 아들과 둘이 사는 동안 가족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그저 평범한 아이들이 누리는 것을 누리게 해주고 있는 것이 뿌듯하고 행복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남편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결혼하여 함께 산지 2년 정도 지나서 둘째 아이를 가졌습니다. 우리 부부는 맞벌이를 해서 집도 더 좋은 곳으로 옮기고 계획이 많았지만, 임신 6개월까지 한의원에 다니고 그만 두었습니다. 임신으로 모든 계획이 틀어져 불안하고 걱정되었지만 남편이 좋아하며 저를 대신해 집안일과 아들을 돌봤습니다. 저는 임신해서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은 어디서 배웠는지 미역국 끓이는 법까지 배워서 날마다 미역국을 끓여주었습니다. 저는 정말 눈물 날만큼 고마웠습니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그래서 첫째 아이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몸조리를 열심히 하여 둘째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스리랑카에 갔습니다. 남편이 한국에서 계속 살기 위해 필요한 비자를 받아야 했고, 시부모님을 만나 인사도 드려야 했습니다. 사실 저는 남편을 만나기 전에는 비행기를 타 본적이 없습니다. 여권도 남편 덕분에 처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리랑카까지 가는 길은 정말 걱정되고 또 한편으로 설렜습니다. 스리랑카 공항에 내릴 때는 녹초였지만 남편의 가족과 친척들이 공항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남편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배운 말 아유보완-안녕하세요?”라는 한마디를 저는 겨우 스리랑카 말로 할 줄 알았습니다. 한국에서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남편이 한국어를 저보다 잘한다는 이유로 스리랑카 말을 배우지 않았던 제 게으름이 한탄스러웠습니다. 친절한 스리랑카 가족들과 한국에서 온 조카며느리를 보기 위해 친척들이 시댁에 모였습니다. 저는 남편이 없으면 말 한마디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호기심 많은 스리랑카 친척들의 질문에 답변을 할 수 없고 말을 할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남편은 친정엄마와 1주일에 한번씩 소주를 같이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국어로 하면서 우리는 아무 어려움 없이 대화하고 사는데, 저는 남편 나라 말을 아이보완 한마디밖에 배우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면 정말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바빠서 스리랑카 말은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들에게는 스리랑카 말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이것도 생각뿐입니다.

 

스리랑카에서 보낸 한 달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스리랑카 식으로 혼인신고도 하고 스리랑카 전통스타일로 결혼식도 올렸습니다.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음식과 문화도 조금씩 배웠습니다. 물론 제 남편의 한국어와 한국문화이해실력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수준입니다. 낯선 곳에 1달간 남편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보니, 한국에서 남편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오면 남편에게 잘해줘야지 다짐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사람들은 저에게 친절하고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늘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인 남편은 어떤 대접을 받았나 생각하니 남편이 한없이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남편에게 무조건 잘해줘야지 다짐했지만 한국에 와보니 힘들고 살기 팍팍해지면 여전히 남편에게 짜증부리고 잔소리하는 마누라입니다. 다행히 남편이 제가 친구도 없고 남편 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다는 것을 알기에 잘 이해해줘서 고맙습니다.

 

남편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 둘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이뿐 아니라 남편이 아들로 받아들인 첫째 아이에게도 늘 한 결 같이 듬직한 아빠입니다. 저와 남편은 아들들에게 따뜻한 가정,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안식처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합니다. 남편은 아빠가 가난한 나라 출신 노동자라서 아이들이 차별 받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합니다. 스리랑카에서 그가 얼마나 사랑 받는 소중한 사람이었는지, 우리 가족에게 얼마나 든든한 가장인지, 우리사회가 인정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도 편견 없이 잘 자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남편과 아들들이 있어 소중한 일상을 잘 지켜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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