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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수상작 ]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며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6-05-19 (목) 15:11 조회 : 1853
어머니의 사랑은 말로 형형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위대하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부모님을 기억하고 효도 하는 날을 제도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나의 친정인 필리핀에는 5월 2번째 일요일을 어머니께 효도할 수 있는 날, 마더스데이(Mother's Day)로 지키는데,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5월 8일을 어버이날로 정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부모님은 내가 결혼하기 전에 모두 돌아가셨다. 시부모님께 직접적인 효도를 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남편과 결혼한 뒤 10년 동안 5명의 자녀를 낳았고, 시부모님 제사를 모시는 날을 기억하며, 아주버님과 시누이들도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온 가족이 함께 고향에 있는 시부모의 산소에도 자주 찾아가고는 했다. 그 덕분인지, 시부모님이 안 계시기 때문인지 남편이 친정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해 효도한 것에 큰 감사를 느낀다.
필리핀에서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 상태가 위독하다는 연락이 왔다.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상태로 링거 주삿바늘을 다 잡아 빼고, 아산에 살고 있는 언니와 나를 찾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병원에 있던 조카가 어머니 상태를 사진으로 찍어서 카카오톡으로 보내왔다. 링거주사를 맞고 산소 호흡기를 끼고 계셨다. 다리와 발 전체는 심하게 부어 피멍이 들고 살이 터져 진물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는데, 너무나 처참한 모습이었다.
당장이라도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 북받치는 서글픈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엉엉 울었다. 영문도 모르는 셋째 수진이와 넷째 아진이도 덩달아 큰소리로 울기 시작해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8월 14일 친정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코에 호스를 연결해 심장으로 관을 넣으면 조금이라도 호흡을 할 수 있어서 생명을 연장 할 수 있대. 병원에서 할 수 있으면 하라고 하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벌써 병원비가 많이 나왔는데 어떻게 좀 도와줄 수 없겠니?”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그 길로 시댁 형제들과 남편이 선물로 사 준 패물을 지인에 맡기고, 돈을 구해 필리핀으로 송금했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밤새도록 울고 있었는데, 남편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로했다.
“어머니 병원비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내가 어떻게든 도와줄게요.”
다음날 남편은 주택청약예금과 다섯째 우진이 돌잔치에 쓰려고 넣어 둔 적금을 해지하고 돈을 준비해 왔다. 남편은 지난번에 병원비로 보내려고 맡긴 패물부터 찾아오라고 하며, 가장 빠른 항공편을 예약해 주었다. 당시 7개월째였던 다섯째 우진이와 함께 친정에 다녀오기로 했다.
출발 날짜를 기다리던 중 8월 24일에 친정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고통스러워하시는데, 통증으로 이렇게 힘들게 사시는 것보다 차라리 하늘나라로 보내 드리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 귀에 전화기를 대어 주었다.
“엄마, 지금 당장 갈 수 없어서 미안해요! 그렇게 고통스럽다면 나를 기다리지 말아요. 지금은 성수기라 비행기 표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대요. 가장 빠른 비행기가 30일이라, 30일로 표를 예매해 놓았어요. 막내를 데리고 30일에 갈게요.” 전화를 하고 나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그날 새벽,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엄마가 어제 너랑 전화 통화를 한 뒤로 필리핀 시간 오후 12시 40분경 편안히 하늘나라로 가셨어.” 나는 “엄마! 엄마!”라고 외쳤다. “이제 내겐 엄마가 없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남편은 말없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날, 목청 놓아 함께 울었다.
많은 일들이 나의 머릿속으로 스쳐갔다. 얼마나 많은 일로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다니던 중, 한 학기를 남겨 놓았을 때 우리 집은 풍파를 겪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학비를 납입해야 할 시점에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져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께 등록금에 대해 말씀드렸지만, 어머니는 버럭 화를 내셨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학비는 무슨 학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한 어머니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하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해야만 하였다. 오히려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해, 잠깐 동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러던 중 나는 미혼모가 되었고, 어머니께 더 많은 근심을 끼쳤다.
몇 년 뒤, 나는 한국인 남편과 결혼했다. 어렵게 임대아파트를 구해 어머니를 한국으로 모셔 왔다. 당시 어머니는 목이 퉁퉁 부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한 갑상선염을 앓고 계셨다. 온몸은 살 한 점 없이 앙상한 뼈만 남아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심장병으로 누가 부축해 주지 않으면 나지막한 오르막이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 숨이 멈출 것 같이 어렵게 호흡을 하실 만큼 위급한 상태였다.
다행히 읍사무소 사회복지사 선생님께 의뢰하여, 구세군심장재단을 통해 심장병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어머님은 놀라울 만큼 건강을 회복하셨고 그로부터 약 2년간 한국에 계셨다. 어머니는 먹고사는 일에 바쁜 나를 대신해 연약한 몸으로 6살 된 첫째 아실리와 3살 된 둘째 준표를 돌보면서 셋째 수진이 돌잔치까지 함께 해 주셨다.
그 뒤 필리핀으로 돌아간 어머니는 작은 구멍가게를 오픈해 5년 동안 운영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 큰오빠가 이혼한 후 어머니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3명의 오빠들끼리 갈등이 심해지게 되었다. 오빠들 탓에 어머니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심장병이 재발하게 되었다. 피부병과 고혈압까지 겹쳐 결국에는 일손을 놓을 수밖에 없으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통원 치료와 입원 치료를 반복하다가 질병을 이겨 내지 못하고 결국 하늘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남편은 어머니 장례비와 필리핀에 가서 넉넉하게 사용하고 오라며, 아이들을 위해 넣어 놓은 보험을 해약하면서까지 돈을 마련해 주었다. 전동 휠체어 없이 혼자 꼼짝도 할 수 없는 근육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몸이 불편하여 장례식에 가 봐야 당신에게 큰 짐만 될 뿐이에요. 아이들 넷은 내가 돌볼게요. 막내 우진이만 데리고 잘 다녀와요.”
일찍 부모님을 여읜 남편이 베푼 내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그렇게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 5일 만에 친정에 도착했다. 병원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필리핀에 있는 큰언니 집에 모시고, 9일째 되던 9월 3일 납골당에 어머니 유골을 안치했다.
어머니의 은혜와 사랑은 끝없이 높고 크다. 나는 그 사랑을 다 갚지도 못하고, 불효만 저지르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아프고 나약한 몸을 가지고 그렇게 크고 넓은 가슴으로 나를 끊임없이 보듬어 주셨다. 손자들을 안아 주시며, 이 세상에서 보여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에게 읽어 주던 ‘효녀 심청’ 이야기가 떠오른다. 아버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효녀 심청’ 이야기가 가슴에 사무치게 아려 온다. 다시 어머니를 만지며 부를 수 있다면, 그동안 못 다한 효도를 하고 싶은데….
나도 심청이처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어머니를 다시 섬기고 싶은데….
늦은 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들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내게 샛별 같이 다가 온 선물 같은 이 아이들에게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어머니가 나에게 보여 주셨던 그 사랑을 이 예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야겠다. 그런 엄마가 되어야겠다. 내 어머니가 보여 주신 그 사랑이 내게로 흘러와 이 아이들 속에 그대로 전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나는 지금 어머니를 볼 수 없지만, 어머니가 나와 항상 함께 계신 것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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