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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수상작 ]

나의 네팔인 친구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6-05-19 (목) 15:04 조회 : 2037

계룡산 연천봉 꼭대기의 등운암이라는 절의 신도였던 나는 토요일 일찍 암자에 올라 기도를 하고 12일을 머물며 암자의 살림을 맡아서 한 때가 있었다. 이 때 네팔을 순례하고 돌아오신 주지스님께서 쿠숨이라는 네팔 사람을 암자까지 데리고 오셨다.

내가 네팔에서 쿠숨을 상대해보니 너무 성실한 사람이라서 우리 암자의 일 좀 도와달라고 데리고 왔어요.”

마흔을 갓 넘긴 그는 네팔의 셰르파로써 가이드로 활동하다가 스님과 인연이 닿아 코리안 드림을 안고 계룡산까지 스님을 쫒아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계룡산 밑의 신원사라는 절에서 해발 800m의 산꼭대기 암자까지 생활필수품은 물론 절에서 사용하는 제수용품을 지게에 져 올리는 일이었다. 그러자니 그는 하루에도 두세 번은 꼭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한국인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등운암 스님께서 네팔을 순례하시다 쿠숨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나는 젊어서부터 등운암의 신도였기에 암자에 오르내리는데 그 누구보다 빨랐으나 쿠숨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쿠숨에 반한 것은 그가 산을 잘 탔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날마다 보리차를 준비해 절 마당 한쪽에 놓아두고 계룡산을 오르내리며 암자를 찾는 등산객에게 대접하곤 했다.

거사님, 올라오시느라 힘드셨죠? 보리차 한 잔 드시고 가시죠.”

그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등산객들에게 보리차를 대접하곤 했다. 그것도 사시사철 더운물로 대접했으니 연천봉을 오르는 등산객에게는 천사 같은 존재였다. 나 역시 등운암의 신도로써 절 살림에 관여했기에 쿠숨과는 일주일에 토·일요일 이틀은 만나야했고 하루 밤은 같이 잠을 잤으며 서로 절간 일을 상의해야 했다. 그는 우리의 관습대로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형님, 절에 커피를 준비해주었으면 좋겠어요. 힘겹게 산에 올라 절을 찾는 사람을 위해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대접했으면…….”

내가 암자에서 일부 금전출납에 관여했기에 그는 나에게 커피를 준비해 달라했고 나 역시 그를 도왔다. 그러니 계룡산 연천봉에 오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꼭 등운암에 들렀다. 그리고 각자 기호에 따라 보리차를 마시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니 불과 1년도 안 되어서 쿠숨의 이름은 산을 오르는 등산객에 퍼져나갔다.

공양 드시고 가시죠.”

점심때가 되어 절에 들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으레 공양 들기를 청했다. 진수성찬이 아닌 시래기 국에 푸성귀 무침과 시어 꼬부라진 김치일망정 시장한 등산객들은 포식을 하고 산을 내려갔다. 그러니 암자를 찾는 사람이 늘고 어느 때부터인가는 시주 물품까지 넘쳐나 절의 살림이 피기 시작했다.

쿠숨, 정말 고마워. 절을 위해 열심히 도와줘서…….”

그는 절 살림을 위해 하루에도 두 세 번씩 계룡산을 오르내리는 피곤함을 잊고 등산객에 물과 음식을 공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처럼 진정으로 절을 위하고 등산객을 위하는 그에게 나도 무엇인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산에 오르는 주말마다 절에 머물며 그에게 한글 공부와 우리말을 가르쳤다. 그는 절에서 받는 월급 150만원을 네팔의 집에 모두 보내고 자신은 돈을 한 푼 쓰지 않았다. 그랬으니 그의 옷은 남루하다 못해 아예 헤어진 옷을 그냥 입고 다녔다. 나는 쿠숨에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 한 벌씩을 사주는 일을 맡아 하였다. 그렇다고 비싼 명품의 옷을 선물할 수는 없었다. 대개 백화점 출입구에 가보면 유행이 지난 옷을 늘어놓고 파는 곳이 있다. 그곳에서 파는 옷은 유행이 지났기에 그리 비싸지도 않고 옷의 질도 괜찮다. 또 그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각종 생활필수품을 사서 건네주었다. 그런데 가끔은 암담한 일이 생기곤 했다. 즉 그가 몸이 아프면 마땅히 대처할 길이 없었다. 그는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병원에 가 진료를 받은 후 약을 타 그에게 전해주는 편법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형님,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 게요.”

내가 옷을 건넬 때나, 약을 건넬 때 그는 고마움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그는 112달 산속에서 살았으니 시내 구경도 하지 못하고 군것질도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절간에서 스님과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니 식생활도 스님과 똑같이 푸성귀만 먹고 살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씩 그에게 치킨이라든가, 또는 수육을 준비해가지고 암자에 올라가 스님 몰래 먹였다.

정말 먹어도 괜찮겠어요?”

절간의 후미진 곳에서 그는 치킨 한 마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우곤 했다. 스님처럼 수행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찰의 일을 도와주는 사람인데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못하니 산을 오르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물론 스님을 속여 가며 사찰 구석에서 그에게 육식을 제공했다는 것은 큰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도 따지고 보면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나는 또 가끔씩 소주도 한 병 싸들고 올라 그에게 건네주곤 했다.

오늘 밤 잘 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먹을게요.”

이처럼 그와 나는 마음도 통하고 행동도 하나일 만큼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스님 올 설과 추석부터는 쿠솜에게 휴가 좀 주셨으면 하는데요.”

거사님, 명절이라고는 하지만 쿠숨이 어디 갈 데가 있나요?”

제가 저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생활하며 우리 문화에 대해 알려주고 향수를 달래준 후 다시 데리고 올게요.”

그렇게 시작된 명절의 휴가를 쿠숨은 산을 내려와 꼭 우리 집에서 보냈다. 설이면 차례를 지내는 우리의 전통을 경험시켰고 세배하는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떡국을 먹고 윷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추석에는 그와 함께 우리 조상님의 산소를 찾아 같이 성묘를 다니며 우리 문화의 뜻을 알려 주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향의 가족을 생각하곤 했다. 그가 네팔에서 스님을 만나 돈을 벌겠다고 2005년에 한국에 들어와 2015년 가을까지 계룡산 산속에서만 살았으니 얼마나 고향생각이 간절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쿠숨, 네팔에 지진이 났다는 보도가 있어. 그러니 어서 집으로 연락을 해봐.”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없는 산속 암자의 쿠숨에게 뉴스를 듣던 내가 휴대전화로 연락을 했다. 순간 그의 떨리는 목소리로 보아 그 때 쿠숨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형님, 저의 집에는 다행히 피해가 없대요. 형님이 걱정해주셔서 그런가 봐요. 고마워요.”

이처럼 그와 나는 형제 이상으로 자별하게 지내면서 정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암자에 올랐더니 그가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다니고 있기에 의아해 내가 물었다.

형님, 우리 아들이 네팔의 최고 대학에 합격했대요.”

어제 저녁 그의 휴대폰으로 날아온 아들의 대학합격 소식에 그는 하루 종일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그가 201510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형님, 구들을 이용해 온돌방을 만드는 방법과 김장하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그리고 지게를 만드는 방법도…….”

암자에서 쿠숨의 처소는 온돌방이었다. 그는 온돌방이 무척 과학적이며 아랫목에 누우면 허리가 쭉 펴진다고 했다. 또 김치는 한국에서 너무 맛있게 먹었고 이제는 김치가 없으면 밥을 못 먹는다고까지 했다. 또 지게는 자신이 사용해보니 네팔에서 머리에 띠를 매 사용하는 바구니보다 훨씬 능률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아내와 함께 계룡산 등운암에 올라 배추를 이용해 김치 담그는 방법은 물론 무로 깍두기 담그는 법까지 동영상으로 제작 CD에 담았다. 온돌을 놓는 방법은 조그만 돌을 이용해 여러 번 설명해 주었고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받아 이 역시 CD에 담아주었다. 그리고 시중에서 파는 알루미늄으로 만든 지게를 구입한 후 해체해 그의 가방에 담아주었다.

꼭 네팔에 한 번 놀러 오십시오. 제가 곳곳을 안내해 드릴게요.”우리는 흔히 현대를 글로벌시대라고 한다. 세계가 이젠 더 이상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의 지구촌으로 형성되어 이웃화 되어가고 있다. 세계가 이웃처럼 가깝게 되었지만 낯선 나라에서 외롭게 사는 이국의 노동자들이 불편함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돕는 것도 불가에서 말하는 보시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들과 교류함으로써 우리의 훌륭한 문화를 소개하고 세계화시킬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자기 나라로 돌아간 쿠숨이 대한민국을 영원히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가끔 전화를 한다.

쿠숨, 꽃피는 5월에는 꼭 네팔에 한 번 갈게.”

형님, 빨리 오세요. 온돌방에서 재워드리고, 푸짐한 김치 반찬으로 식사를 하고, 안나푸르나를 꼭 보여 줄게요.”

나는 요즘 쿠숨의 집에서 묵으며 네팔의 새로운 문화를 배우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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