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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수상작]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날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5-05-28 (목) 00:12 조회 : 3002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날

  LI  CHANGFAN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이 하나쯤은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귀여운 딸을 고향에 남겨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2006년 3월 6일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 돈도 벌고 나의 가족의 꿈도 펼쳐보리라는 기대와 희망으로 나의 가슴은 쿵쾅거리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나의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도 했지만 차차 한국 생활에 적응해 갔다. 3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면접시험도 보고 건설회사에 취직도 해서 열심히 일을 했다. 1년 쯤 지나자 한국 생활은 훨씬 수월해 졌다. 우리 가족의 꿈이 실현될 날을 그리며 힘든 일이 있어도 참을 수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나는 주로 외벽에 대리석을 붙이는 일을 주로 맡아서 했다.
2007년 여름 어느 날 내 인생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도 4층에서 건물 외벽 대리석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추락 사고를 당한 것이다. 4층에서 맨 바닥으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 후 나는 정신을 잃었고 구급차에 실려 고려대 구로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고 한다. 3일 동안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동료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척추수술을 받고 한 달 동안이나 중환자실에 머물러야 했다.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는 사태의 심각함을 알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나자 일반 병실로 옮겨져 물리치료를 시작했다. 고향에 두고 온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기억하면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았다. 그러던 중 절망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걸을 수 없을 거라고 ......  하반신 마비라고 했다. 물리치료를 열심히 받으면 걸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희망이 산산 조각난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 졌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고 그저 잊고 싶었다. 석 달이 지나자 대학병원에서는 나 같은 환자는 더 이상 그곳에 입원해 있을 수 없으니 재활병원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근로복지공단 인천병원으로 이송되어 재활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된 나는 절망에 늪에 빠져 매일 술과 담배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울증까지 와서 결국 3개월이나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깨어 있으면 자꾸 나쁜 생각을 하니까 잠이 오는 진정제를 많이 처방하셨는지 치료받는 동안 참 많이도 잤다. 석 달의 정신과 치료를 마친 후에도 나는 종종 자살충동을 느꼈다. 나는 병원 앞 육교를 바라보며 ‘저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거기까지 휠체어를 밀고가 그 난간을 붙잡고 뛰어내리려고 시도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이었기에 담당 의사 선생님과 물리치료사 선생님들이 내가 휠체어를 타고 병실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주시하면서 관리를 했다.

‘특별관리대상 환자 이창범’이 하루하루 죽음을 생각하며 방황하던 그 때 한 줄기 빛처럼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심리치료를 받게 되었는데 심리학과 과장님께서 나를 상담해 주시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내가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기 시작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하다가 산업재해를 입은 환자들에게 치료와 재활을 도와주는 산재법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시며 용기를 가지고 삶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산업재해보상보험에 대해 알게 되면서 내 인생은 다시 의미를 찾게 되었다. 비록 하반신은 마비되어 휠체어를 타게 되었지만 내게 다시 꿈이 생긴 것이다. 꿈이 생기자 즐거운 마음으로 물리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도 나의 간호를 위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작년 여름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사귄 친구들로부터 볍무부 사회통합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나중에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산재병원에서 함께 재활 치료를 받고 있던 친구들 세 명과 함께 사회통합프로그램 운영기관을 찾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를 맞이해 주신 센터 대표님은 따뜻한 미소로 우리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도 경청해 주시며 언제든지 문제가 생기거나 마음이 무거울 때 찾아오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통합프로그램 사전평가를 보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셨다. 센터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휠체어가 드나들기 쉬운 곳으로 교실도 배정해 주시고 우리가 병원 치료가 없는 날에 강의를 받을 수 있는 날짜를 조정해 주시는 등 많은 편의를 봐 주셨다. 이렇게 우리는 작년 9월부터 사회통합프로그램 <한국어와 한국문화>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10시부터 시작하는 한국어 수업에 지각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요즘도 매일 아침 일찍 휠체어 바퀴를 힘 있게 밀며 집을 나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주일에 이틀 수요일과 금요일에 한국어 공부를 하러 가는데 하반신 마비인 우리에게 4-5시간을 앉아서 공부를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다리가 절여오고 통증이 몰려오는 때도 있다. 세 친구 중에 한 친구는 지난겨울 결국 공부를 포기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가 없다. 열심히 참석하는 우리들에게 한국어 선생님은 ‘우리반 모범생들’이라고 불러 주시며 아낌없이 응원을 해 주신다. 그리고 함께 공부하는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가까워졌다. 그래서 그런지 이젠 4-5시간의 한국어 공부시간이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함께 라서 좋다.  사고를 당하고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죽음을 생각하며 방황하던 나에게 손을 내밀며 준 그들과 함께 라서 좋다.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도와 준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는 것이다. 산재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도 있고 따뜻한 가슴으로 어둠 속에 잠겨있던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려 주신 분들 덕분에 용기를 내어 이제는 장애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다시금 세상 앞에 설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아내와 딸과 함께 한국에서의 행복한 미래를 꿈 꿀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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