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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수상작]

비 내린 후 갬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5-05-28 (목) 00:05 조회 : 3132

 

<비 내린 후 갬>

        NGO THI CAM NHUNG

 

  갑자기 비가 오고 금방 그치는 게 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뒤를 돌아보니까 한국에 온지 6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번 재한외국인 생활체험 수기를 통해 저의 사연을 털어 놓고 싶어서 글을 쓰게 됐습니다.
  6년 전 남편 하나 믿고 저는 낯선 땅에 따라 왔습니다. 한국에 처음 올 때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희망과 꿈을 안고 왔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스물 넷 아가씨는 두 아이 엄마가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에서 산지 6년이 되었지만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서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 쉬지 않습니다. 힘들 때 아이들을 보고 힘을 내면서 하나, 하나씩 넘겨가며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한국에 사는 동안 제일 힘들 시기는 작년이었습니다. 저의 남편은 술을 워낙 많이 좋아해서 거의 매일 마십니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일은 안 하고 집에서 놉니다. 애도 둘인데 돈을 벌지 않으면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정말 간단한 대답을 했답니다. “내가 일하는데 힘들어서 그만 두는데 왜 다들 뭐라고 하냐?”, “그만두는 건 내 마음이야!”,“내가 일을 아예 안 한 대?, 조금 쉬었다가 또 다른 일 알아보면 되잖아! 막말로 니가 일 그만두면 내가 옆에서 너한테 왜 그만 두었냐고 닦달하면 너는 좋냐?” 또 이렇게도 말합니다. “적성에 안 맞는 일 억지로 하니까 내가 일을 그만두지”온갖 핑계를 다 댑니다. 사실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했던 것도 다 그만두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가장이면 당연히 식구들 먹여 살리고 일을 해야 하는 게 필수이건만 어떻게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생활에 시달리니 이혼 생각도 납니다. 남편의 무능력과 무책임이 저의 어깨를 무겁게 합니다. 그리고 잔인한 말도 자주 합니다. 돈이 없어도 애들은 잘 큰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걱정 안 할 수 있겠습니까? 학원비를 국가가 지원해주었지만 특강수업에 참석하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일을 좀 하라고 부탁했는데도 저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할 수 없이 저는 부업을 시작했습니다. 얼마 못 벌지만 한 푼이라도 벌고 싶었습니다. 아이를 돌보랴 일을 하랴 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내, 두 가지 역할을 다 해야 합니다. 밖에 가면 말도 안 통하는데다가 생김새도 달라 마음을 터놓고 얘기를 할 친구들도 많지 않습니다. 힘든 상황을 겪고 있어서 그런 걸까요?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무지 들었습니다. 근데 무작정 가면 고향에 계시는 엄마와 아빠,  친척들에게 어떻게 이야기 하나, 그리고 이웃들을 만났을 때 고개를 들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심을 내리고 참고 살고자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족들은 상상도 못 합니다.
   설상가상인가요? 이제 큰 애는 3살, 작은 애는 5개월 밖에 안 됐는데, 갑자스럽게 남편이 췌장암에 걸린 탓에 병원에 입원해야 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데다가 금전적인 여유도 없고 치료비를 당장 내야하고 생활비도 필요한데 주위에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망설인 끝에 친정 어머님께 부탁했습니다. 금전적으로 도와주시는 건 없었지만 엄마가 한국에 오셔서 아이들을 돌봐 주셨습니다. 엄마가 계셔도 너무 힘들고 지쳤습니다. 그런 어머니는 저의 모습을 보시면서 한 말씀 하셨습니다. 네가 쓰러지면 너의 자식들은 어떻게 하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느꼈습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구나’하고 말입니다.
   저는 이를 악물고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계약직으로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고마운 분들을 만났습니다. 처음이라 일을 익숙하게 하지 못해서 속상했는데 옆에 계신 이모께서 저를 보시며 말씀을 하셨습니다. “괜찮아 처음에 누구나 다 실수하기 마련이야. 하다보면 잘 할 수 있다고 열심히 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모가 천사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부터 이모와 친해졌고 쉬는 시간에 먹을 것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꼭 나눠서 먹었습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이모와 같이 얘기하고 조언도 구하고 위로도 받았습니다. 특히 이모가 시골에 갔다 오시면 저에게 챙겨주시는 것이 옥수수나 감자였는데, 이것들을 먹으면 차갑기만 했던 저의 마음이 따뜻하게 녹는 듯 했습니다. 정말 고마운 분이었습니다. 행복했던 인연이었습니다. 그 이모님과 요즘은 연락을 하지 못하지만 그 이모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좌절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었습니다. 항상 투박한 손이 부끄러워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저의 손을 꼭 잡고 쓰다듬어 주셨던 이모님의 손길이 그립습니다. 그 시절, 이모를 만나지 못했다면 한국에서 버틸 수 없었을겁니다.
   사람을 힘들 게 하는 것도 사람이고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가끔 한국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으로 힘들었고, 남편의 무책임한 행동과 말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면 안 될 생각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행운처럼 다가온 이모님과 같은 고마운 분들로 인해서 저의 삶은 따뜻해졌습니다. 행복해졌습니다. 한국어를 못하는 저에게 열정과 따뜻함으로 한국어를 가르쳐주시는 선생님들. 혹시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는지 물어봐 주시는 복지사님과 상담사님들. 그리고 다문화센터에서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정말 세상에 살아가는데 힘들 때가 많지만 잘 넘기면 저절로 행복해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도 그렇지 않습니까? 겨울철이 오면 말라버리고 봄이 오면 새순이 돋듯이 모든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 같습니다. 힘들 일을 겪더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여러 문제를 겪었지만 저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더 고맙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련을 극복하고 강한 의지를 키웠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잘 생활해 나갈 수 있게 도와준 모든 분들게 어떻게 감사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감사를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에 온 선택이 맞는지 안 맞는지 아직 모르겠지만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힘들 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삽니다.
   저의 앞으로 계획은 미용사 자격증을 따는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미용사가 된다면 불우 이웃인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 분께 머리를 잘라드리고 싶고  조금이나마 봉사도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소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남편이 지금은 건강이 회복됐으니까 술을 줄이고 회사에 꾸준히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미우나 고우나 함께 살아가야할 동반자로서 건강하게 열심히 힘을 합쳐 살아내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바랍니다. 그러고보니 우리 아이들만 챙기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단원고등학교 옆에 삽니다. 세월호 사고가 있기 전, 저는 이 학교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떠드는 소리가 우리 아이들을 깨우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면서 내심 짜증을 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텅빈 운동장을 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아이들이 전과 같이 재잘거리며 떠드는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2014년. 한국에 살면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때가 바로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지금도 세. 월, 호. 이 세 글자를 말하면 눈물부터 나올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유가족들이 소리를 외치거나 쓰러질 때 한 동에 사는 저는 그 아픔을 공감합니다. 올해 4월 16일, 이제 1년이 됐습니다. 4월 9일에 저는 세월호 아이들이 생전에 썼던 방과 물건들을 전시사진을 보고 갔다 왔습니다. 아이들이 남겨 놓은 유품을 보고 학부모가 팽목함에서 쓰셨던 이불도 한번 만져보았습니다. 같은 엄마로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유가족분들 그 아픔을 빨리 극복하고 빨리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일반 가족이나 세월호 유가족 여러분 2015년 봄철처럼 꽃처럼 만발하게 피었으면 좋겠습니다. 파이팅!
   저도 이제 지금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셨던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내 옆에 있어주는 가족들, 그리고 내가 힘들면 두드릴 수 있는 문이 되어주는 다문화센터를 든든한 백으로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늘로 떠나간 아이들을 위해 살아있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낯선 나라 한국에 와서 서툰 한국어로 살아가는 아줌마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저는 지금 내리는 비보다 더 세찬 비를 맞을 겁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비도 언젠가 그치기 마련이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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