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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수상작]

불혹을 넘긴 나이에 얻은 소중한 나의 가족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5-05-27 (수) 23:39 조회 : 3299

불혹을 넘긴 나이에 얻은 소중한 나의 가족 

        행자부-005
조 경 철 

 

두 사람이 기대어 있는 모습을 표상하고 있는 “사람 인(人)” 자를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소망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나 역시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장애로 인해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면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당시 불혹을 넘겼던 내가 장애를 극복하고, 좋은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빌립보서 4장 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위로가 되어 이렇듯 불가능해보였던 나의 소망이 마침내는 이루어져서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는 불혹을 넘긴 내 나이와 장애에 상관하지 않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열심히 살아보겠다는 아가씨를 소개시켜주겠다는 말을 듣고 2007년 8월 무작정 필리핀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는 그곳에서 환경과 조건을 따지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필리핀 여성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한국에서는 그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고 외롭게 지내왔던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아가씨들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가 선택한 여성은 레오니자라는 이름의 미혼모였다.
필리핀에서 10일 동안을 함께 생활하게 되었는데, 1983년생인 레오니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속이 꽉 차고 마음씀씀이가 야무지고 당당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전동휠체어 없이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중증장애를 앓고 있는 나를 최고로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곳에서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던 나는 그녀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도 서로 그리워질 때마다 우린 서투른 언어로 전화통화를 하고, 우리부부에게 다리를 놓아주었던 사람을 통해 가끔 용돈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중증장애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에 놓여있었던 내가 필리핀에 두고 온 아내를 한국으로 데려오는 것은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출입국사무소와 법무부의 까다로운 절차들을 통과하고, 필리핀 정부와 한국대사관을 통해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참 많았다.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지체하는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고 아내는 어쩔 수 없이 필리핀에서 출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2년이 지난 2009년 3월 19일에서야 필리핀에 있는 아내가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반가움보다도 필리핀에서 남편 없이 홀로 두 아이를 키워야했던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이 더욱 컸다. 한국에서만큼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고 싶었는데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당시 어느 장애인공동체에 있는 조그만 방 한 칸에 살고 있었던 나는 필리핀에 있는 내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이 찢어지고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공동체 가족들의 배려와 사랑으로 꿀벌을 키우면서 조금씩 수입이 생겨서 한국에 있는 우리부부는 생활면에서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다.
아내는 필리핀에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꿀벌을 키우는 일도 제법 잘 도와주었다. 그러다 홍동여성농업인센터에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이후로도 아내는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알뜰살뜰하게 잘 모았고, 꿀벌을 키우는 일이나 내 뒷바라지하는 일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나는 2009년 장애인기능대회에 출전하여 금상을 받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이런 소식들이 형제들에게 전해지면서 형님과 여동생은 필리핀에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구하라고 아파트 임대 보증금을 마련해주었다.
2009년 11월, 우리부부는 드디어 임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같이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우리부부는 이후 필리핀에 있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면사무소를 찾았다. 입양해야 할 딸 아실리와 아들 준표를 호적에 올리고자 했는데,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적이 필리핀으로 등록되어 있어서 한국대사관과 필리핀대사관 및 법무부에서 귀화 허가 신청을 하고 출입국사무소를 통해서 복잡한 서류절차를 밟아야만 가능할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부부는 가정법률 상담소를 통해 수수료를 포함한 비용 300만원을 지불하고 아이들을 어렵게 호적에 올릴 수가 있었다.
석 달이 지난 2010년 2월, 아내는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비행기 삯과 비자 수속 경비를 어렵게 준비해서 필리핀으로 갔는데, 아내는 두 아이와 장모님 비행기 표를 구해놓고도, 마무리할 서류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이틀 먼저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작 두 아이와 장모님은 바로 한국으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한국에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서류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두 아이가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인천공항에서 아내와 나는 많이 울었다. 다시 증빙서류를 갖추어서 만들어 보내고 나서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두 아이와 장모님이 한국에 들어오실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렵게 한국으로 들어왔지만, 한국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규교육기관에서 아이들을 받아주지를 않았다. 국적을 취득하기까지의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걱정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홍성 다문화지원센터의 도움으로 기다리는 시간동안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들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2012년 3월, 법무부장관의 허락으로 아이들은 드디어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초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우리가족은 사랑의 결실로 두 딸과 막내아들을 더 낳게 되어 5남매를 가진 대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 우리가족은 홍성의 어느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오손 도손 잘 살아가고 있다.
매일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서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이 우리 가족의 첫 번째 일과이다. 나는 우리가족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고 있으면, 큰딸 아실리는 동생들을 챙겨 식탁에 앉자 함께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고, 아내는 3개월 된 다섯째 우진이를 데리고 나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마치고 우리 가족은 “근면, 협동, 배려로 함께 나누는 행복한 우리집”이라는 가훈을 합창 하고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아내는 곧바로 우리가족들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첫째 딸 아실리는 동생들의 이부자리와 방을 정리한다. 아들 준표는 막내 우진이의 분유를 먹이는 등 동생을 돌봐주고, 수진이는 성경책을 정리한다. 넷째 아진이은 아빠 소변 통을 버리는 등 전동휠체어를 타고 있는 아빠를 챙겨준다.
곧바로 학교에 가야 하는 아실리와 어린이집으로 가야 하는 세 남매의 뒷바라지하는 것도 정신이 없는데, 중증장애로 꼼짝 못 하는 나의 뒷바라지도 불평과 원망 없이 최선을 다해 하는 아내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내가 움직이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세면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의 시시콜콜한 부분들까지 모두 도와준다. 재활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는 나를 다시 외출 전용 전동휠체어에 옮겨주고 배웅해준다. 짜증을 낼 법도 한데 불평불만 없이 기쁨으로 곁에 있어주는 아내가 있어서 너무나 행복하다.
 첫째 딸 아실리는 초등학교 4학년생으로, 한국에 온 첫 해에 환절기만 되면 천식이 생겨 자주 병원에 다녔는데, 폐렴까지 겹쳐서 위급했던 적도 있어 병원에 두 번 입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주 건강해져서 태권도 품 띠 1품까지 받고, 아실리는 학원에서나 학교에서나 친구가 많은 인기인이다. 엄마아빠가 없을 때는 집안을 책임지는 맏이로서의 역할을 다 한다.
둘째 아들 준표는 율동을 잘해서 어린이집 원장님과 선생님들께 사랑을 듬뿍 받고, 막내 동생도 잘 보살펴주고 있는 아들 준표는 책도 잘 읽고 아빠가 내주는 받아쓰기도 잘하는 똑똑한 장남의 역할을 다 해주는 것 같아 아빠인 나에게 큰 힘이 된다.
우리가족의 새침때기이자 욕심쟁이인 셋째 딸 수진이는 발레 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다. 수진이의 꿈은 유명한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넷째 아진이가 있다. “엄마!”, “아빠!” 큰 소리로 부르면서 가끔씩 징징대기도 하고, 언니 오빠들의 공부를 방해하기도 하는 미소천사 아진이의 호기심은 대단하다. 궁금한 것은 뭐든지 다 물어본다. 지금은 언니와 오빠가 하는 게임들이나 율동들도 잘 따라한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시간 강사를 하고 있는 아내는 아이들이 잘못한 것이 있으면 엄하게 훈계하기도 하는 여장부이며, 항상 우리가족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진행성 근육병으로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지만 컴퓨터 그래픽, 출판, 포스터 등 각종 공모전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고 있다. 현재는 국제장애인기능대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
앞으로도 우리가족 앞에 많은 시련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나왔던 과정들을 생각해보면 그런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일상 속에 녹아있는 작은 행복들을 보았고 내 모든 것이 되어주는 소중한 가족들이 있기에 나는 오늘도 힘차게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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