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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수상작]

저의 행복으로 나타난 천사들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5-05-27 (수) 23:15 조회 : 3017

저의 행복으로 나타난 천사들

            행자부-049
바두아로이다

 

1995년 11월 11일 28살의 저는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왔습니다. 너무나 낯선 곳이고 음식도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서 거의 3개월 동안 달걀하고만 밥을 먹었습니다. 주위사람들이 “아! 필리핀 사람들은 달걀을 좋아 하는구나”라고들 했습니다.
남편은 막내였지만 우리는 결혼 처음부터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어요. 시아버님께서 담배를 많이 피우는 분이셨는데 제가 담배냄새를 싫어하는 걸 아신 어머니께서 며느리가 담배 피는 걸 싫어하니까 끊으라고 하시자 정말 곧바로 집안의 모든 담배를 버리고 끊으셨어요. 시부모님이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필리핀에서 온 작고 그리 멋있지도 예쁘지도 않은 저를 이렇게 소중히 여겨 주시고  존중해주신 이젠 돌아가신 시부모님이 지금도 제 가슴에 그리움으로 함께 계십니다.
 시어머님은 제가 결혼하기 전부터 중풍으로 누워계셨는데 2010년 돌아가실 때까지 15년을 어머님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병수발을 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은 저보고 너무 힘들겠다고들 했지만 당시 저는 그렇게 힘들고 고생스러웠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왜냐하면 저의 시부모님은 제게 친정 부모님처럼 따뜻하셨으니까요. 제가 이화여대 어학당에 다니고 있을 때인데 우산도 안가지고 갔는데 비가 왔어요. 저는 버스 정류장에 내렸는데 깜짝 놀랐어요 아버님께서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와 계신 게 아니겠어요? 제가 버스에서 내리자 한손엔 당신 우산을 쓰시고 다른 손에 드신 우산을 크게 흔드시면서 얘야! 하시며 반갑게 저를 부르시는데 그 때 저 역시 얼마나 반갑고 기쁘던지 얼른 우산을 받고는 펼치지도 않고 저도 모르게 아버님의 우산 속에 들어가서 아버님의 팔짱을 꽉 꼈습니다. 그 날  제 가슴이 얼마나 포근하고 달콤했던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어머님을 엄마라고 불렀고 가끔씩 친정엄마에게 하듯 반말도 하며 친하게 지냈습니다. 제가 농담으로 “엄마, 우리 집은 작고 돈도 많이 없어서 맛있는 것도 잘 못 먹고 힘들고 불편한데 집도 넓고 잘사는 큰형님 집에 가서 살면 좋잖아?” 그러면 어머님은 “난 여기가 제일 좋다. 네가 없으면 난 재미가 없어”하셨어요. 그러는 동안 3명의 귀한 보물들인 아이들을 낳았어요우리는 두 칸 좁은 집에 7식구가 함께 생활했습니다. 불편하긴 했으나 마음은 그리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을 살려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남편과 의논하여 핸드폰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낮엔 아버님이 어머님을 돌봐주시기로 했습니다. 낮에 공장에서 일하며 있었던 일을 저녁에 다 이야기 해드리며 함께 웃으며 지냈습니다.

일도 하고 시부모님들을 돌보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정말 바쁜 나날을 지냈습니다. 시부모님이 저희 집에 계시니까 명절이나 부모님 생신 때엔 4남매 자식들이 저희 집에 와서 함께 식사를 하고 가곤 했습니다.
어느해 어머님 생신날엔 제가 몸이 안 좋았는지 다른 때보다 음식을 만들면서 몹시 피곤했는데 저녁에 남편 형님내외와 시누이 내외 모두 우리 집에 모여 축하 식사를 하고 여전히 모두들 설거지하나 도와주지 않고 간 뒤 저는 완전 파김치가 되어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어서 그냥 방에 들어 가서 자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님께서 음식을 많이 드셨는지 기저귀는 차셨지만 대변을 잔뜩 봐서 요에 까지 묻혀 놓으셨습니다. 그걸 본 순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어요. 남편과 아이들이 방에 들어와 보고는 그 때 초등학교 5학년 큰 아들이 “엄마 내가 할머니 용변을 치울테니까 가서 잠을 자“ 하는게 아니겠어요. 남편도 ”설거지는 내가 할게“ 저는 그때 소리 내어 울만큼 지치고 힘들었지만 저를 알아주고 배려하는 고마운 우리 멋진 아들과 남편, 가족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꼈어요.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없이 아름다운 우리 가족의 사랑이 지금도 한번 씩 힘들 때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반짝 반짝 빛을 내며 힘을 주고 있습니다.

2006년 우리 가족에게 어둠이 닦쳤습니다. 남편이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아무 일도 못하게 되었지요. 생계를 제가 다 꾸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님과 남편까지 돌봐야하기 때문에 핸드폰 공장을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 집 원장님께서 제 사정을 아시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시고자 어린이 집에 일주일에 한번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달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사실 저는 한국오기 전 필리핀에서 고등학교에서 농예과 교사로 근무했었기에 가르치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어린이 집 아이들 중 한명의 어머니가 윤선생 영어선생님이었는데 아이를 통해 제 얘기를 듣고 윤선생 영어교실 원장님께 제 얘기를 하셨나 봐요. 어느 날 윤선생 원장님께서 직접 제게 전화를 해 주셨어요. 로이다 씨는 필리핀에서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교육을 받고 영어선생님이 되면 어떻겠느냐고요. 기뻤습니다. 그리고 아픈 가족들 돌 볼 시간을 배려해서 일을 배정해 주시겠다는 말씀까지 해주셨어요. 정말 너무나 고마운 전화였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 생계는 부족하나마 꾸려갈 수 있었어요. 그 후 5년 동안 윤선생 영어교실 선생님으로 아주 기쁘게 일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11평 정도 되는 방 두칸 집에서 살았는데 아이들이 어릴 때는 괜찮았으나 커가니까 많이 불편하고 힘들어져서 제발 방이 3개 있는 집에서 아이들에게 방을 따로 주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습니다. 어느 분이 임대주택에 대해 알려 주셔서 남편에게 의논 했더니 안 된다고 하며 집이 좁아도 그냥 살자고 강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혼자 고민 고민 많이 하다가 남편 몰래 남편 주민등록증을 살짝 가지고 국민은행으로 가서 매달 10만원씩 넣는 청약저축을 하고 말았어요.
3년 후에 임대주택 청약이 가능하다는 전화를 받고 일단 너무 기뻤어요. 남편은 당시 중환자실에 입원 중이어서 병원비도 만만치 않는데 어떻게 할까 도 고민하는데 누군가가 당첨이 될지 안될지 모르니까 한번 신청해 보라고 하는 말에 청약하는 날 8시간을 줄서서 기다려서 했어요. 우리는 당첨이 되었어요. 일단 참 기뻤어요. 은행 대출을 받아 우리 가족은 1년 후에 방 3개가 있는 25평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아이들도 좋아했고 시부모님들도 또 그렇게 반대하던 남편도 무척 좋아했습니다. 어머님은 새 아파트에서 4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또 지인의 소개로 이중언어 강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서울 교육대에서 양성과정을 공부하고 이중 언어 강사 수료증을 받고 현재까지 5년 계속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의 방과 후 영어 강사직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부모님들이 돌아가셨고 친정 어머니도 돌아가시는 슬픈 일들이 있었지만 남편은 다행히 회복되어서 아주 건강하진 않아도 실 염색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3년생인 든든하고 착한 첫아들과 이쁜 둘째 딸은 고 2년생이 됐고 사랑스런 막내 아들은 고등하교 1년생으로 잘 자라주었어요. 한국에 처음 온 필리핀 며느리를 사랑해주시고 항상 고맙다고 해주신 우리 시무모님과 어려울 때마다 좋은 이웃들이 천사처럼 나타나 좋은 길들을 제게 알려주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모든 어려운 산들을 잘 넘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한국에서 만난 저의 모든 천사님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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