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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_안녕하세요!! 리린 리나얀티 입니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5-03-26 (목) 22:50 조회 : 1278


안녕하세요!! 리린 리나얀티 입니다. 한국명 : 이연지 
         
  어느덧 한국에 온지도 벌서 15년째가 되었네요. 지금 살고 있는 한국과 인연은 산업 연수생으로 입국하여 회사에 근무하면서 1년이 지나면서 근무하던 회사에서 지금의 남편과 1년 정도 교재를 하였답니다.
  어느덧 2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 연수가 끝나 한국에 더 머물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불법 이여서 어려우니 인도네시아에 먼저 가있으면 내가 데리러 갈께"라며 저를 안심시켰답니다. 부모님 결혼 승낙을 받기위해 2주후쯤 남편이 인도네시아에 도착했습니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한달만에 겨우 어렵게 승낙을 얻어 제가 인도네시아에 온지 한 달 후에 결혼을 하여 한국에 다시 와서 신혼살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한지 1년이 지나도 아이 소식이 없자 불안해서 남편과 병원 가서 검사도 받아 봤습니다. 둘 다 정상인데 제게 약간의 불임원인이 있어서 임신이 안 될 수도 있다 하여 한 달간 치료도 받았습니다.
배란 주사도 맞고 배란 수가 많아야 임신이 된다고 하여서 열심히 병원도 다니면서 치료를 한 후 드디어 임신을 하였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병원도 열심히 다니며 산전검사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게 무슨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입니까?' 어렵게 임신을 했는데 '다운증후군' 이란 판명을 받게 되어 낙태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에서 놀기도 뭐해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직장을 구하여 회사도 다녔습니다. 회사를 다니던 중에 두 번째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병원도 열심히 다니며 산전검사도 꾸준히 하였습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께서 이번에는 건강한 아이라고 하였습니다.
임신을 하니까 먹고 싶은 것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고향 음식이 먹고 싶은지... 현실에서는 먹지 못하고 꿈속에서만 고향 음식 많이 먹을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래도 저는 무척이나 행복했었답니다. '10개월 후면 어여쁘고 건강한 우리 아이를 만날 수 있겠구나!' 정말 기뻤습니다. 빨리 뱃속의 아이와 만났으면 하고 생각 하니 세월이 정말 빨리 흐르더군요.
  어느덧 세월은 흘러 10개월이 지나 출산을 했답니다. 아이를 낳아 보니 제 부모님이 무척이나 보고 싶더군요. 그러나 부모님 보고 싶은 생각은 접을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이를 낳아 기르던 중 세 번째 임신을 하게 되어습니다.
임신의 기쁨도 잠시, 살고 있는 집이 2년 계약이 끝나서 집 주인과 남편이
재계약 하고 난 다음날 법원에서 편지 한통이 왔더라구요.
무슨 일인가 싶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여 법원에서 편지 왔다고 하니 회사에서 일하다 말고 집으로 와서 보더니 집이 경매에 넘어 갔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경매가 무언지 알지 못했습니다. 남편에게 경매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때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저는 임신 중이라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야 하는데 엄청 나게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임신 중인데 뱃속에 아이 한테는 이상이 없어야 할텐데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병원도 열심히 다니며 산전검사를 받았습니다. 병원에서는 다행히 아무 이상 없다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정말 이상이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거예요 아기 출산일이 되어 병원에 가서 아기를 분만 하였는데 아이가 울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 호흡도 하지 않는다며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해야 한다고 말씀 하시더군요.
서울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겨 검사를 하던중 의사 선생님이 말씀 하시기를 '아이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 하시기에 아이를 낳아 안아보지도 못하고 하나님 품으로 보내야만했습니다.
  아이를 낳아 잃고 집도 경매에 넘어가는 이중고에 시달리다 보니 정서적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답니다. 그러다보니 고향에도 가고 싶고 부모님도 보고 싶어 우울증으로 시달렸습니다.
우울증으로 시달리는 나를 위해 친정인 인도네시아를 한번 다녀오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2004년에 우리 가족이 결혼 후 처음으로 저희 딸과 남편 세 식구가 친정으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약 20일 정도 친정 집에 있다가 한국에  나왔는데 남편은 직장으로 출근을 하였는데 회사에서 '회사에 일이 없으니 집에서 좀 더 쉬였다가 회사에서 부르면 출근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남편은 명퇴 아닌 명퇴를 당하고 광주에 내려와 시누이 집에서
일을 했답니다. 저는 딸아이와 둘이 지내고 남편은 한 달에 한 번 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저는 또 임신을 했습니다. 임신 중이라 먹고 싶은 것도많은데 옆에 남편도 없으니 먹고 싶은 것은 제가 스스로 해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출산일은 다가오고 남편도 곁에 없고 출산일이 다가오니 시어머니께서 올라 오셨습니다. 시어머니가 계신 가운데 출산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어여뿐 공주였는데 시어머니는 조금은 서운하신가 봅니다.
그래도 저는 좋습니다. 왜냐하면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게  돼서 정말로 기뻐습니다.
  출산 한달 만에 광주에 이사를 왔어요. 광주에 이사를 와 아는 사        람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아무 의미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광주에 이사 와서 사는데 전라도 사투리를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님께서 "얘야 걸레 하나 가져 오렴" 하시더군요. 저는 무슨 말씀인줄 몰라서 방을 닦는 방걸레를 가져 가니까 어머니께서 "그거 말고 애기 기저귀 말이다." 라고 말씀 하셨답니다.
'사투리는 왜 이렇게 어려워요?' 광주에 이사 와서 셋째아이를 출산하여 따르릉 엄마가 되었답니다.
  아이를 셋을 키우며 열심히 살고 있는데 서구청 다문화  가정을 위해 서구 여성발전 센터에서 외국인 여성을 위해 한국어 교육이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남편은 나가서 배우라고 해 열심히 배워서 한글을 많이 알게 되었어요. 다문화 가정 아동 프로그램 대상자에 해당 되어서 방문 선생님이 오셔서 일주일에 2회 교육을 하고 받았습니다. 
방문 선생님이 오셔서 많이 도움이 되었고요, 요리도 배우고 친구도 많이  사귀게 되었답니다. 상무2동 동장님 사무장님, 계장님, 임은정 검사님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이름도 한국 이름으로 개명하여 지금은 이름이 '이연지' 라고 한답니다. 주변 에서 저를 도와주신 모든분 들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도와  주신 분들의 도움으로 서구청장님 표창장도 받았습니다.
저는 광주에 와서 첨단 산업 인력 공단 외국인 근로자통역 자원봉사자로 위촉되어 활동을 하며, 소방안전 본부 119센터 자원봉사자로도 활동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로 부터 도움을 받은 만금 저도 남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합니다.   
  드디어2009년이 되어 우리 큰딸 주영이가 학교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아이들이 엄마가 외국인이라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주영이가 엄마가 외국인 이라고 해서 따돌림이나 놀림을 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걱정을 했어요. 처음엔 주영이와 학교에 가는데 애들이 "야 외국사람 이다." 그러더군요, 그래서 "나도 한국사람 이다. 주민등록증 보여줄까?" 하면서 보여 주었더니. "이상하네?"하더라고요.
비록 저는 피부색은 다르지만 마음은 다른 사람과 같습니다. 지금은 주영이의 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잘해주니 무척이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2년전에  그때 당시 2011년 3월달에 대학으로 입학을 하고, 아동보육복지과로 다니고 2년 전문대학으로 입학을 했습니다. 젊지만 너무 많이 배우게 됩니다. 올해 2월 19일 대학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주변에서 저를 도와주시는 남구다문화 센터  직원분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밖에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열심히 노력해서 저에게 도움주신 분들의 노고해 보답하고자 열심히 노력하여 실망 시키지 않고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도 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저도 기꺼이 이 한 몸 아끼지 않고 노력  할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제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훌륭히 키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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