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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_버스는 항상 당신이 제일 절망적일 때 온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5-03-26 (목) 22:44 조회 : 1316


버스는 항상 당신이 제일 절망적일 때 온다. - Hoangguohua

  나는 2008년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한국 회사 중국 주재원으로 중국에 체류 중이던 남편을 만나 중국에서 3년을 거주하였다. 임신을 하게 되면서 아이 교육문제로 우리는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안정된 직장과 생활을 다 버리고 한국에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고 남편은 아이를 한국에서 교육시키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이었다. 시아버지가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연세도 많으시고 자식들 중에 물려받아 운영 할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시집에서도 계속 한국에 와서 살라고 하였다. 우리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세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임신 5개월 때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이야 중국과 한국의 물가 차이가 별로 없지만 당시는 꽤나 많은 차이가 났던 걸로 기억이 된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자금에 융자를 받아 작은 아파트 하나를 구입해서 한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따분하였다. 울산에 친구도 없는데다가 임신을 하여 몸이 무거우니 어디 마땅히 갈 데도 없고 남편은 새로 맡은 일 때문에 아침 일찍 나가면 저녁 늦게 귀가하였다.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그냥 집에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으로 중국에 있는 친구들과 메신저를 하고 잠을 자는 일이었다. 아파트에서 생활한지 몇 개월이 지나서 나는 우리 아파트에 아주 이상한 말을 하는 아줌마들이 셋씩이나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생김새도 좀 다르고 아줌마들이 모여서 뭐라고 할 때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편의점 아줌마가 어눌한 나의 한국말을 듣더니 외국에서 왔냐고 물으면서 그 아줌마들은 베트남에서 온 아줌마들이라고 하였다. 나의 고향은 중국 제일 북쪽 하얼빈이다. 그 곳에서 생각했던 베트남은 아주 먼 나라이고 신기한 나라였다. 그런 나라 사람들이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니... 진짜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나는 쓰레기를 버리려고 1층으로 내려가는데 어딘가에서 익숙한 중국어가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 아줌마 하나가 통화를 하고 있는데 몇 번을 들어도 중국어였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 아줌마가 통화를 하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왔냐고 물어 보았다. 그 아줌마도 놀라서 눈이 동그래지면서 맞다고 하였다. 나는 대화를 좀 더 오래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피부가 까맣고 마른 아저씨가 나타나자 그 아줌마는 황급히 말을 끊으면서 " 우리 남편 중국어 하는 거 싫어해! 나 ○○○호 살아! 내가 기회 봐서 한번 찾아 갈께! " 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 후로 매일 그 아줌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줌마는 오지 않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늦은 오후에 우리 집에 찾아왔다.
  우리는 긴 시간동안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아줌마는 한국에 유학을 왔다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문화차이와 나이차이가 많이 나서 결혼 생활이 힘들다고 하였다. 우리는 자매처럼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그 집 아저씨와도 자주 왕래하다 보니 아저씨를 이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집 아저씨는 뱃사람 이였다. 매일 배를 타다보니 햇볕에 그을려서 얼굴이 까맣게 되었고 뱃일이 워낙 험해서 배에서 내리면 술부터 찾는다고 하였다. 전에 사귀던 한국여자가 있었는데 직업 특성상 휴일이 일정치가 않고 수입도 고정적이지 않아서 같이 몇 년을 살았지만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친구를 통해 지금의 와이프를 소개받았다고 하였다. 비록 뱃사람이여서 생각이 단순하고 가부장적이기는 하지만 어린 나이에 고향에서 혼자 울산에 올라와 배를 타서 번 돈을 차근차근 저축하여 지금 사는 작은 아파트도 마련하고 생활력이 강하고 착한 사람 이였다. 나는 내가 느낀 점을 친구에게 이야기하면서 우리 남편은 중국에서 많은 월급을 받았지만 알뜰하지 못하여 융자를 받아 집을 마련하였고 앞으로 10년은 걸려야 그 빚을 다 갚는데 너는 나와 비교하면 얼마나 시집을 잘 왔냐고 설득하였다.
  우리 둘은 약속을 하고 베트남 아줌마 집에 놀러 가기로 하였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손짓 발짓 해가면서 교류를 하였다. 처음에는 소통이 힘들었지만 똑같이 외롭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들이어서 우리들은 말하지 않고 눈빛만 봐도 서로를 이해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도 대화는 좀 힘들지만 급한 일이 생기면 아이를 대신 맡아 줄 정도로 친정식구처럼 잘 지내고 있다. 베트남 아줌마들은 한국에 온지 몇 년이 되어서 우리보다 아는 것도 많고 정보도 빨랐다. 다문화지원센터라는 곳이 있으니 우리보고 그 곳에 가서 도움을 받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문화지원센터라는 곳을 알게 되어서 찾아가게 되었다.
  그 곳에 가서 나는 또 한번 깜짝 놀라게 되었는데 캄보디아, 인도, 필리핀, 일본 러시아 진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에서 외국 사람을 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한국에 와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으니 신기한 일이였다. 그때 까지는 진짜 신기하고 좋았다. 하지만 차츰 나는 센터 사람들의 태도에 의문이 가게 되었는데 ... 다름 아닌 내가 조선족이라는 사실 때문 이였다. 참으로 내가 생각해도 애매한 일이였다. 교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고 조선족이라는 사람도 있고 중국인 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나를 속상하게 하는 것은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갔는데 조선족이면서 왜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 이였다. 하지만 내가 그곳으로 가게 된 것은 아주 거창하게 큰 도움을 받기보다는 한국 생활에 필요한 지도를 받고 싶었고 심리적으로 기댈 사람이 필요했으며 나를 믿어주고 따뜻한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비록 이런 눈총을 받기는 했지만 따뜻하게 맞아주는 결혼이민자들과 중국 사람들 때문에 나는 꾸준히 나가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비록 나 자신도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지만 나보다 못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화가 되지 않으니 가정불화가 깊었고 누가 통역을 해주지 않으면 소통이 아주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단순한 생각은 또 한번 충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당시 결혼이민자의 집으로 찾아와 한국어 방문 수업을 하는 한국어지도사가 있었는데 나는 그 분에게 나의 이런 생각들을 말하였다. 하지만 그 지도사는 몹시 긴장을 하면서 "너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어!" 하고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서 중국어 강사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더니...그 지도사는 또 " 중국어 강사, 넌 조선족인데 강사를 할 수 있겠어 " 하고 말하였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 분이 그 후 부터는 나를 아주 경계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훗날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분은 당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이던 일본 결혼이민자 때문에 다른 결혼이민자에 대해서 아주 경계를 하고 있었다. 일본 분이 방문교육을 너무 잘하셔서 경쟁심도 있고 경계심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는 자존심에 아주 큰 타격을 입었고 한국 생활에 회의가 들었다. 실제로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맨밥에 간장을 비벼먹으며 대학을 나오기까지 나는 자존심과 악으로 버텨왔는데 한국에서 품은 소박한 꿈을 이렇게 단호하게 부정하는 사람 때문에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나를 더욱 속상하게 한 것은 그 뒤로 그 분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아파트에 교육을 올 때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해도 인사를 잘 받아 주지 않는 등 아주 냉정하였다. 그리고 다문화센터에서도 중국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지 않았다. 돈을 밝히고 공짜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베트남사람들은 아주 좋아하였는데 베트남사람들은 착하고 형편이 아주 어려워도 끝까지 잘 산다고 하였다. 센터 프로그램을 참여하면 펜이나 수건 같은 작은 선물이 있는데 중국 사람이 선물을 챙기면 욕심스럽고 베트남 사람이 선물을 챙기면 알뜰하다고 칭찬하였다. 진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이러하니 나 혼자서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결혼이민이 중국에서 시작 되였고 이민자들도 중국이 제일 많으며 혼인이 파탄이 나거나 가정불화를 격는 사람들도 자연히 중국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아마 이런 편견들이 생겼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 나라 국민들의 특성과도 아주 관련이 있는데 중국에서 여성의 지위가 높고 가정의 결정권이 여성에게 있다.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기가 센 여성이다. 그리고 사회주의를 거치면서 참고 인내하는 유교적인 여성관이 타파되어 있는 말을 하는 당당한 여성관이 형성되었다. 하고 싶은 말을 못 참고 한다. 또한 자본주의가 유입되면서 실리를 따지고 큰 것을 위해서라면 작은 것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아는 사람들이 중국인이다. 하지만 내가 본 베트남사람들은 전통적인 여성들이 많았다. 그래서 국제결혼 대상으로 베트남이민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밖으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뿐이지 어려운 것은 똑같다. 단지 침묵을 하느냐 아니면 침묵 속에서 폭발하느냐 하는 문제 였 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거창하게 어떤 일을 하기 보다 우선적으로 중국 사람들에 대한 이런 인식을 개선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맡아하고 센터가 필요할 때 적극 도와주었으며 자원봉사 활동을 많이 하게 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원봉사는 꼭 나가 군 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상담 자원봉사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상담사가 상담 시 옆에서 통역을 해주는 일이였다. 분명 상담 약속을 해 놓고 나갔는데 오지 않아 허탕을 치는 일도 있었지만 나는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열심히 하였다. 옆에서 오래 통역을 하다 보니 어깨너머로 들은 것도 있고 차츰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에게 힘과 용기를 준 것은 내가 사는 것이 힘들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상담실을 찾아오는 결혼이민자들에게 비하면 나는 아주 행복 한 사람 이였다. 적응이 힘들긴 해도 나는 가정폭력이나 가정불화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봉사를 했을 뿐인데 아주 고마워하고 못난 나에게 나마 기대려고 하는 모습에서 나는 힘과 용기를 얻고 이런 분들을 위하여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연히 나는 1366여성위기전화에서 자원봉사자를 선발하는 공고를 보게 되었다. 자원봉사지만 요구 조건은 까다롭다. 상담원 교육을 받았거나 관련학과를 나온 사람들 위주로 선발을 하였다. 나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평범한 아줌마였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당시 사무국장이었던 분한테 편지를 썼다. 나는 그동안 다문화센터에서 상담봉사를 하면서 느낀 점과 나의 부족한 점을 열거하면서 같은 이민자를 돕고 싶기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고 사무국장님을 만나 뵙게 되었는데 그분은 내가 쓴 편지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는 순수 자원봉사이기 때문에 보수도 없고 또한 센터 특성상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전화가 갈 수 있는데 괸잖냐고 하였다. 나는 하고 싶다고 하였다.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지만 활동을 하면서 나는 진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사연과 사건들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특히나 가난하지만 대체로 화목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란 나였기에 눈앞에 펼쳐진 가정폭력 현장이나 왜곡된 성인식으로 인하여 행하여진 성폭력의 피해자를 볼 때 나는 겉으로는 침착한 체 하였지만 속으로는 두려움과 분노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얽히면서 봉사를 하고 집에 돌아간 날은 꼭 불면증에 시달리곤 하였다. 생활비를 아껴서 모은 돈으로 택시를 타고 당시 어린 아들을 맡길 데가 없어 나는 아이까지 등에 업고 이주여성 쉼터와 법원 경찰을 오가면서 열심히 하였다. 나를 보고 남편은 여러 번 그만두라고 하였지만 어려움에 처한 결혼이민자들을 도와서 문제를 해결했을 때 느끼는 뿌듯함과 보람은 그 무엇보다도 큰 힘 이였다.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누군가를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 도와주면 반대로 내가 어려울 때 꼭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자원봉사를 하면서 제일 안타까운 점은 한국 사회가 결혼이민자를 많이 받아 들이고 있지만 열린 마음이 아닌 무조건 한국 방식을 따라서 이민자를 변화시켜 혼인생활을 하려고 하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특히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가정에서 결혼이민자의 초기 적응은 상상도 못 할 만큼 힘들다. 물론 잘 적응하고 행복하게 사는 이민자도 많지만 내가 만난 이민자들의 생활은 대체로 아주 어려웠다. 자국에서 하던 것과 완전히 다른 집안 일을 맡아 하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특히나 중국, 베트남, 필리핀, 몽골 등 주요 아세아 국가는 온돌문화가 아니어서 시골에서는 신발을 신고 집안에 들어가고 쪼그리고 앉는 것은 해보지도 않았거니와 방을 닦는 것도 해본 적이 없다. 한 집에 가니까 이민자가 상담을 하는 내내 자꾸 손을 등 뒤로 숨기였다. 그래서 우리가 손을 보자고 하였더니...그 두 손은 다 갈라지고 터져서 피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하니 가사 일이 배우느라 하루 종일 물에 담그고 있어서 손이 이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가끔 그 두 손이 떠오르면 가슴이 아려온다. 또 한 이민자는 결혼 3개월 만에 파경을 맞았는데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였다. 시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남편은 이민자를 데려올 때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데려왔는데 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으니 우리 더러 본국으로 돌려 보내라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말로만 듣던 일을 눈앞에서 보니 나는 기가 막히었다. 나이 어린 이민자는 결국 3개월 만에 이혼녀가 되어 본국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떠나는 뒷모습을 차마 바라 볼 수가 없었다. 
   꾸준히 봉사 활동을 하다 보니 차츰 주위 사람들로 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다문화지원센터의 추천을 받아서 학교에 파견되어 다문화이해 강사로 활동도 하고 해양경찰에서 민간통역요원으로 활동 하게 되었다. 이런 나에게 드디어 다문화 관련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교과부에서 다문화학생 교육복지 차원에서 시교육청마다 다문화코디네이터를 배치하여 다문화학생 들의 공교육 진입을 지원하고 있는데 다른 시도 교육청에서는 한국 사람들을 위주로 선발을 하였지만 울산에서는 고맙게도 결혼이민자를 채용하게 되어서 내가 운이 좋게 채용이 된 것이다. 나는 시교육청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더 큰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고 내가 전까지 하였던 많은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요하고 보람찬 일을 접하게 된다. 바로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는 교육문제다. 나는 내 생각이 아주 단순하고 좁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한국 생활 적응과 이민자들의 인권문제만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정작 이러는 사이에 제일 고통 받는 사람들은 우리의 아이들이였고 여러 가지 복잡한 사회적 가정적 요건  때문에 아이들이 일반 가정 아이들 처럼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특히 학교에 들어가면 많은 문제점들이 표출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재혼가정의 아이들은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다. 학교 실태조사를 나가면서 나는 진짜 이 점에 공감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만난 재혼가정의 아이들은 열 명에 아홉 명은 하나 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부모의 재혼으로 한국에 입국하게 되면서 한국어의 부재와 새로운 가족 구성원 들과의 관계형성 그리고 학령기아동들은 학교적응과 교우관계  때문에 괴로움을 많이 호소한다. 거의 대부분이 중국 아이들인데 내가 학교에 찾아가서 중국어로 상담을 하면 상담실에 들어 올 때 축 처져있던 아이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하면서 아이들은 생기를 되찾는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하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부처님께 감사드렸다. 내가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 드리고 나에게 이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라고 빌었다. 아이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부모님들과도 알게 되었고 어려운 점이 무엇인지 어떤 지원을 해주면 아이들이 잘 자라날 수 있는 지 터득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원 대책을 강구한 결과 제일 효과가 있었던 것은 학교로 찾아가는 순회교육 이였다. 일주일에 두번 아이들이 있는 학교로 찾아가 상담과 함께 이중언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을 하는데 초창기에는 전문적인 한국어 교사가 없었기에 부족하지만 내가 학교로 나가서 순회교육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 두 번 와서 한국어가 얼마나 향상 될 수 있느냐는 것 이였다. 그리고 한국 사람도 아닌 외국인이 와서 이상한 말을 쓰면서 한국어 교육을 한다고 하니 몰래 상담실 밖에서 엿듣는 사람, 아예 필요 없다고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크게 간과한 한 가지 사실이 있는데 사실 한국어 교육도 중요하지만 고립된 섬처럼 외롭게 떠있는 아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심리적인 안정과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지지해주는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원인  때문에 아이들은 부족한 나를 믿고 의지하고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는 이런 점을 여러 번 강조하고 설득을 하였다. 입장을 바꾸어서 상상을 해보면 알아 듣지도 못하고 말할 수 도 없는 생소한 환경에서 하루 종일 침묵하고 있다가 소통이 되는 사람이 찾아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다려 지겠는가. 본국에서는 제법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아이들이였지만 한국에 와서는 대체로 아주 낮은 자존감을 보이며 희망을 잃고 수업시간에 거의 잠을 자거나 빨리 커서 독립을 하는 것이 목표인 아이들이 대부분 이였다. 그리고 제일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재혼가정의 특성상 아이의 정서나 교육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 이였다. 이민자들은 아이를 한국에 데리고 오면서 발생하는 경제상의 문제  때문에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이 힘들고 귀가시간도 늦다보니 아이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한다. 그리고 새아버지는 이미 자녀가 있기도 하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으니 더욱더 아이에게 관심이 없다.
  아이들의 한국생활을 살펴보면 새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새아버지가 아이에 대해 관심이 많고 적극 개입하는 가정은 아이들이 적응도 빠르고 학교 생활도 잘 한다. 반면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경제적인 문제로 아이의 교육을 반대하거나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가정은 아이들의 한국생활이 어렵고 반항심이 크며 가정 밖으로 도는 경우가 많다. 제일 가슴 아팠던 것은 한 아이가 상담을 하면서 자기는 집에 가기 싫다고 하였는데 자기 집 같지 않다고 하였다. 엄마와 새아빠 그리고 아직 어린 동생이 한 식구 같아서 항상 학교에 제일 마지막 까지 남아 있다가 더 이상 학교에 있을 수 없을 때에야 귀가하군 하였다. 그리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빨리 집에서 독립하고 싶어서 라고 하였다. 나는 뭐라고 위로를 해주었으면 좋을지 몰라 아이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래서는 안되 겠다 싶어 나는 아이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아이들의 특기와 장점을 살려 지역 축제에 내보내기도 하고 다문화가족 청소년 문예대전에 출전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다. 평소에 공부에는 흥미가 없고 부모와도 다툼이 잦던 아이가 지역축제에서 멋진 탱고를 선보여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을 때 문예대상에서 금상을 받아 부모를 감동시켰을 때 나는 진짜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다. 지금은 다문화가족학생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다양하게 이루어져서 한국어 강사와 이중언어 강사가 배치되어 아이들에게 전문적인 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우리 아이들을 위한 다문화 특별학급이 일선 초, 중,고 에 설치되어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가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KSL교재(제2언어로서의 한국어교재)가 보급이 되어 한국어 교육에 전문성을 부여한 것이다. 교육은 백년대계이다. 비록 한국 태생은 아니지만 이 땅의 모든 다문화학생은 앞으로 한국에 살아갈 한국인이다. 이 아이들이 잘 자라서 진정한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여 한국의 발전에 기여 할 수 있도록 하려면 제일 중요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과 제대로 된 교육지원을 해주는 것이다. 아직도 일선의 학교에서는 우리의 아이들을 거부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일반 가정의 아이들에 비하여 보살핌이 많이 필요하고 지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 이다. 또한 낮은 학업성적  때문에 어느 학교장의 말처럼 “물을 흐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하는 학교에서 조차 거부하면 우리 아이들은 갈 곳을 잃는다. 결국 이는 또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하여 지금 지원하는 비용보다 더욱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한국은 이미 다문화사회에 진입하였다. 보다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우리 아이들을 보듬어 주기를 모든 사람들에게 간곡히 부탁드린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나의 고민은 계속 된다.어떻게 아이들을 지원해 줄까? 아이들을 거부하는 학교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아이들에게 교육이 시급한데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 공교육 진입을 반대하는 아버지들을 어떻게 설득할까. 낮은 자존감을 보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회복 해 줄 수 있을까. 앞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오직 한가지, 더 이상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 해 보면 한국에 입국하여 지금까지 진짜 열심히 살아 왔던 것 같다. 그리고 조선족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나는 여기 저기에서 소속을 잃은 채로 도움이 필요해도 도움을 받는 것이 미안한 일이 되었고 그렇다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아주 불편함이 없이 살아 갈 수도 없었다. 한국에 와서 3년은 아주 힘이 들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지금도 시어머니의 암이 재발되어서 투병 중에 있고 아이의 언어 발달이 여전히 또래에 비하여 늦기는 해도 가정적으로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면 나는 아주 행복하다. 그리고 요즘은 내 손으로 직접 건강보험료도 낼 수 있고 세금도 낼 수 있으니 이제야 비로소 이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아주 자랑스럽다.
  나는 지금 막 결혼 생활을 시작하는 이민자들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다. 국제결혼은 아주 정성스럽게 영위해야 행복 해 질 수 있다. 당장 눈앞의 현실은 힘들겠지만 인내하고 부지런히 배우는 자세를 취하면 꼭 웃을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의 아이들 만큼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해서 아이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자.    이 땅의 모든 결혼이민자 분들!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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