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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수상작 ]

(우수상)TRAN THI NGOC ANH_인연의만남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7-04-28 (금) 01:09 조회 : 641

인연의 만남


TRAN THI NGOC ANH

1999년에 내 미국인 여자교수님이 베트남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옆 좌석의 한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가 그는 온라인게임 회사의 사장이었고, 또 그가 영어 통·번역가를 구하고 있었다는 걸 듣고 교수님이 자기 대학교에서 곧 졸업할 학생들을 소개해 줬다. 그 사장이 학교로 찾아와 3차 면접을 거쳐 합격한 나는 고향을 떠나 170km 먼 거리 둔 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어느 날에 동료언니가 인터넷에서 인쇄한 영어레슨을 가져와서 가르쳐 달라고 했다. 나도 영어를 더 배우고 싶어서 그 사이트에 가입했다. 2일 후 어느 한국인 남자에게서 방금 그 사이트에 가입했다며 베트남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메일이 왔다. 일주일 2~3씩 메일을 보내줬다. 왠지 그의 말투에 마음이 들은 나는 편하게 온갖 이야기를 했다. 석 달 후 그 사람이 베트남으로 여행 간다면서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서로 알아 볼 수 있게 사진을 보내 줬다. 그의 사진을 보자마자 나는 그의 똑똑해 보이는 넓은 얼굴에 남의 마음을 녹이는 미소를 보고 바로 마음이 흔들렸다. 그가 오는 날에 나는 떨린 마음으로 약속한 장소로 갔다. 같이 식사한 후 호치민 시내를 구경시켜 줬다. 그의 멋진 미소와 똑똑해 보인 얼굴, 풍부한 유머와 자신감 때문에 내가 벌써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벌써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가 다른 지역으로 여행가야 돼서 저녁에 헤어진 후 집에 돌아간 나는 그 남자만 생각했고 그리웠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서로 계속 메일로 연락해 줬다. 그가 내 그리운 마음을 알아챘는지 어느 날에 그가 나와 더 친하게 지내고 싶다며 야후메신저로 매일 채팅하자고 했다. 2달 후 공통점이 많은 두 사람의 서로 그리운 마음으로 일주일동안 태국 여행을 가기로 했다.
정서를 숨기고 친구처럼 2일 동안 방콕에서 여행했다가 3일째에 Khosamed이라는 섬으로 내려갔다. 그 날 밤에 깊은 하늘에 반짝거린 별빛아래의 해변에 단 둘만 산책하고 있었다. 그가 내 손을 몰래 찾아 잡아 줬다! 사랑을 느끼며 같이 손을 잡아 한 높은 바위에 올라가 같이 별을 봤다. 그가 내 긴 머리를 땋아 주면서 서로의 마음을 토로했다. “나랑 결혼해 줄래요?”라고 한 그의 말을 들은 순간이 내 평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 이였다. 그가 미리 준비한 목걸이를 꺼내 내 목에 끼워 주면서 약혼 선물이라고 했다. 그와 남은 행복한 3일 동안 그 섬에서 지내고 다시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한국인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내 말씀을 듣자 어머니께서 우시며 반대하셨다. 나는 그에게 말하자 그가 “그럼, 내가 당신의 고향에 일주일동안 가서 지낼게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부모님께 보여드리면 어떨까요?”라고 했다. 나는 부모님께 그의 말을 전하고 사진을 보여드리며 설득했다. 그의 사진을 본 후 의외로 부모님께서 그가 어질어 보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며 흔쾌히 결혼을 허락하셨다. 마침내, 그의 첫 편지를 받은 날로부터 바로 1년 후 내 고향에서 그가 내 손에 행복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결혼식 일주일 후 설레 이는 마음으로 신랑과 함께 한국에 왔다. 일주일 후 한국어를 배우려고 이대 어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요리하고 싶었는데 외동딸인 나는 본국에서 만날 어머니의 음식만 먹고 요리한 줄 몰랐다. 나는 영어로 된 요리책을 보면서 여러 가지 요리를 해봤지만 그 음식을 먹은 적이 없어서 이상한 음식을 많이 만들었다. 열심히 요리를 연습하는 내 모습을 보며 착한 남편이 잘 먹어 줬다. 반면, 같이 살던 남편의 여동생이 집에서 먹을 수 있는 반찬이 없다고 퇴근 후에 자주 먹고 들어왔다. 내 속상한 마음을 알아챈 남편이 여동생과 말다툼을 했다. 결혼하기 전부터 평화롭게 살던 오빠·여동생관계였는데 나 때문에 두 명이 며칠 동안 서로 얼굴도 안 봤다. 스트레스가 쌓인 내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어로 용기를 내어 집근처의 전통시장에 자주 가서 식품을 살 때마다 정육점 및 채소가게 주인에게 한가지씩의 요리법을 물어봤다. 덕분에 몇 개월 후 내 한국어실력과 요리 실력이 많이 늘었다. 대신,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 왔을 때보다 6 kg의 체중이 빠졌다.
세월이 흘러 2년 후 귀여운 딸이 태어났다. 시부모님께서 340km 먼 거리를 둔 합천에서 살고 계시고 내 친정어머니께서는 치매를 앓던 할머니를 간병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에 못 오셔서 나 홀로 딸을 키웠다. 어느 새, 5살이 된 딸이 어린이집에 가게 된 날이 되었다. 딸이 어린이집에 간 후 심심한 나는 뭘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바로 다음날에 한 남자 분한테서 전화가 와서 베트남어 상담사를 구하고 있는데 취직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보셨다. 몇 개월 전에 결혼이민자 모임의 대표가 필요해서 참여하라고 내 집전화로 해 주셨던 분이셨다. 베트남어로만 상담하면 될 줄 알고 면접을 보러 갔다. 합격해서 바로 다음날에 교육받기 시작했다. 다른 교육생들 보다 나는 4일 늦게 교육을 받은 관계로 아무것도 몰랐다. 300장 넘은 한글로 된 법률관련 책을 받은 내 눈앞이 캄캄해 졌다. 6일의 교육이 끝난 후 전화상담하기 시작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시작했다. 베트남어 콜이 하나도 없었고 모두 다 한국어 콜만 왔다. 어떤 한국인 남자 분한테서 전화가 왔다. “‘재외국민등록부등본’을 발급받고 싶은데 어떻게 받아요?”라고 물었다. 헉? 그게 뭐지? 당황해서 내가 다른 한국인 동료한테 물어 본 후 그 남자 분에게 “죄송하지만 외교통상부에 문의해 주시겠어요?” 라고 말하자 그 분이 버럭 화가 나서 “너,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 아무것도 모르고 뭘 해서 거기 않아 상담하는 거야? 내 말 들어! 당장 내려 나가, 알겠어?” 라고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쇼크를 받아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뿐만 아니라 나는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아서 고객의 문의를 이해하지 못해서 상사에게서 많이 야단도 맞았다. 본국에서 외동딸로 가정에서 사랑을 듬뿍 받았고 대학교에서 우등생이었던 나를 보고 친구들이 감탄했고 졸업 후 취직했던 회사에서도 칭찬을 자주 받았던 나는 타지에서 이런 일을 당해서 마음이 무너졌다. 남편이 속상해서 나보고 그만두라고 했다. 나는 친정어머니에게 울면서 그만두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객관적인 이유로 그만두게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노력하면 할 수 있는 일인데 얼마 안돼서 포기하겠다면 평생 어디를 가도 실패하는 사람이 될 거야. 그럴 때 엄마한테 다 이야기를 해. 엄마가 다 들어 줄게”라고 많이 위로해 주셨다. 힘을 얻어 그 날부터 나는 매일 딸을 남편에게 맡기고 저녁을 먹은 후 계속 새벽 3시까지 공부했고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출근했다. 쌓인 스트레스와 부족한 잠으로 인해 면역역이 떨어져 감기에 걸렸고 어린이집 생활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딸도 감기에 걸려 거의 3개월 동안 나와 딸은 3일마다 병원에 다녔고 매일 감기약만 먹었다. 노력 끝에 입사한지 1년 후 상사로부터 인정과 칭찬 포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만족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 나는 몇 년 후 우수사원으로 해외연수 포상까지 받았다. 올해 3월19일이 나의 10주년 근무 기념으로 포상을 받았다.
예로부터 시어머님과 며느리의 관계가 항상 안 좋다는 이야기가 많다. 결혼 전부터 나는 결혼하면 착한 며느리가 되어서 시어머님의 사랑을 꼭 받게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첫해에 시부모님과 한국어로 대화할 수 없어서 나는 공부 삼아 매달 편지를 내 마음을 담아 써서 경남 합천에 계시는 시부모님께 보냈다. 임신을 시작했을 때 입덧이 너무 심해서  고향에 가서 2달 반 있는 동안에도 시부모님께 계속 편지를 보내드렸다. 1년 후부터 한국어가 늘어서 빠짐없이 주말마다 한국어가 서툴어도 시부모님께 안부 전화해 드렸다. 시댁에 갈 때마다 나는 시어머님 옆에 붙어서 하시는 일을 관찰하고 배웠다. 명절에 하루 종일 바쁜 나를 보고 속상한 남편이 저녁에 계모임으로 일부러 데려가려고 했는데 나는 시어머님을 혼자 일하게 놔두고 갈 수 없고 집에 남아서 일하겠다고 했다. 내가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보고 어머님께서 좋아하셨지만 남편이 장남이라서 시어머님께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리 집이 큰집인데 나중에 내가 없으면 명절에 너 어떻게 할 건지 걱정이다.” 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도 걱정이 돼서 더욱 더 노력했다. 어느 해부터 걱정에 잠기셨던 어머님의 웃음의 햇살이 보이셨다. 명절에 집에 온 숙모님들한테 시어머님께서 차례음식을 보여주시며 “내 며느리가 한 거야. 손 솜씨가 좋아서 예쁘게 만들었어. 나 없이도 혼자서 척척 잘 해”라곤 환하게 웃으시며 자랑하셨다. 시어머님께서 자주 나를 껴안고는 말씀하셨다 “처음에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길 위해 먼 베트남에 가야 돼서 멀미가 심한 내가 아들한테 한국여자들이 많은데 뭐 하러 베트남까지 가는 거냐고 했어. 그런데 네가 내 딸보다 낫다. 딸이 나한테 자주 전화해 주지 않아. 네가 매주 전화해 줘서 고마워. 한국며느리들이 시댁에 가서 일하기 싫은데 네가 직장일은 바쁜데도 명절에 일부러 일찍 와서 일하고 일이 많아도 항상 웃고 씩씩해. 내 며느리가 되어 줘서 고마워. 엄마가 행복해. 사랑해, 내 며느리 ”라고 하셨다. 시어머님께서 나를 딸로 대우해 주고 계신다. 나도 시어머님을 친정어머니처럼 사랑한다.
지금은 한국은 내 두 번째 고향이고 생활하기에 어려운 일이 없는 것 같다. 그 섬에서 “타지에서 결혼생활이 지금 우리가 여행가는 거와 같지 않다. 내가 당신 옆에 있어도 도와 줄 수가 없을 때가 있을 탠데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어요?”라고 그가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사랑 덕분에 나는 고생했던 모든 일들을 이겨냈다. 내 사랑아, 100세까지 지금처럼 매일 내손을 잡아 주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 와도 우리 서로 손을 놓지 말고 같이 손잡고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가자, 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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