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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수상작 ]

(특선)PIAOLIANJI_한 조선족여성의 한국정착기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7-04-28 (금) 01:07 조회 : 649

한 조선족여성의 한국정착기  

박 연희 

  

 방송국이라는 좋은 직장을 버리고 아들애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2010년 말에 한국행을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첫 시작은 꽤나 근사했다. 모 동포신문사 기자였다. 하지만 한 달 급여가 겨우 90만원이라 월세나 교통비, 식사비용 등을 빼고 나면 얼마 남지를 않았다. 한 달 만에 신문사를 사직하고 바로 3D업종에 뛰어들었다.

처음 식당에서 홀써빙을 시작했을 때 냅킨, 셀프, 리필 등 뜻도 몰랐고 메뉴도 영어로 되어 있는 것이 많아서 외우지를 못했다. 포스를 찍어야 하는데 좌석위치를 혼돈하기도 했고 손님들의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욕도 바가지로 먹었고 자존심 때문에 손님들과 다툼도 여러 번 했었다.

손님들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주방에 들어가니 채소이름은 왜 그렇게 복잡한지? 같은 배추도 얼갈이, 봄동, 알배기 등으로 불려서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얼갈이를 가져오라는 찬모의 심부름을 받고 창고까지 갔지만 한참이나 헤매다가 찾지를 못하고 되돌아왔을 때 한심해하던 그 눈길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반찬을 만들 때 기름에 볶아만 먹었는데 나물무침을 하라고 하니 양념이 뭐가 들어가는지 몰라서 또 주방언니들의 눈에 찍히기도 했다.

식당이 싫어서 피해간곳이 모델청소였다. 콘돔과 지저분한 휴지와 먹다 남은 음식들이 널려있는 모델을 청소하는 일은 본인만 참으면 될 듯싶었는데 너무 손님이 많아서 체력이 딸렸다. 20여일 만에 모델청소를 그만두고 나오는데 ‘일하러 온 것이 아니라 놀러 왔구먼.’ 하는 사장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밥 먹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12시간 물통을 양쪽 어깨에 메고 정신없이 뛰어다녔는데 이게 논거라니.

친구의 추천으로 강남의 한 부자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게 되었다. 180평에 화장실 세 개가 있는 집이고 식구가 일곱이라 일양이 적지 않았지만 퇴근할 때 가방에 뭔가 넣어가지 않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와 계란이 없어진다며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 비가 오지 않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불과 베개, 침대커버를 옥상에 널어놓고 문지를 털어내는 일들은 그래도 참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구십 세가 넘는 노 할머니가 가만히 집을 탈출하면 하염없이 길거리에서 찾아다녀야 하는 일에는 그만 지쳐버렸다. 급여를 올려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8달 만에 그 부자 집에서 나오고 말았다.

그동안 한국에서 서러움과 무시는 일상이었고 체불임금으로 노동부에 신고까지 했다. 한글을 쓸 줄 알고 한국어를 사용할 줄 알지만 조선족은 분명히 중국에서 오래 동안 살다보니 의식주만이 아닌 문화와 의식도 한국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후 단순하게 일할 수 있는 곳이라 생각해서 들어간 곳이 바로 죽집이었다. 야채 죽에 필요한 재료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큰 대야로 2개씩 세 시간을 볶다보니 한쪽 어깨가 아파났고 매일같이 오른 손으로 만 죽을 젖다보니 2년이 되었을 때 한쪽 팔에 이상이 생겨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후 뒷수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일할 수 없게 되자 고향에 돌아가 치료도 할 겸 휴식을 하고 두 달 후에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그때가 2015년, 한국에서 생활한지가 4년이 넘는 때였다. 그해 7월에 나에게도 행운이 찾아와 한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중국통역 겸비서, 후에는 다문화특별보좌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비록 인턴이지만 여의도의 출근족이 된다는 것은 조선족아줌마에게는 신데렐라보다 더 큰 꿈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더 큰 시련이 숨어있었다.

인턴이 전화를 받는 것이 주되는 업무인데 전화를 받아도 한국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다른 직원에게 넘겨줘야 했고 방송기재들이 영문자로 표기돼 있어 기재들을 다룰 수가 없었다. 동영상을 유투브와 유쿠에 올리는 일도 새롭게 배워야 했는데 이 모든 것은 실로 육체노동보다 더 큰 고역이었다. 

통역도 결코 쉽지 않았다. 손님마중, 음식접대는 기본이고 중국인과 한국인들의 비유를 서로 맞추어서 통역을 해야 했고 때로는 3.4명이 모이면  그들의 대화를 일일이 통역하다 보니 몸이 녹초가 되어 밤늦게 귀가하기가 일쑤였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오면 일이 익숙하지 않아 동료들의 눈총을 받았다. 그렇다고 후퇴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영문들을 복사를 해놓았고 눈에 익혔으며 인터넷에 매달려 열심히 배웠다.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국회는 나에게 색다른 경험이었으며  한국사회를 알아 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혹독한 시련 속에서 하루 12시간 고된 일에 시달리면서도  매일같이 빼먹지 않고 하는 일은 퇴근 후 한 시간 때로는 2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수필 수기 칼럼을 쓰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100여 편의 작품을 동포신문지상에 연재하였으며 허핑턴 포스터코리아라는 한국의 블로그에도 11편이 발표되었다.

일하는 동안 짬짬이 시간을 내서 심리상담사교육을 일 년간 받고 2급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따냈으며 그 덕분에 지금은 서울시 서남권 글로벌센터에서 중국통역 겸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생활 6년이 넘었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지난날의 자신을 완전히 바닥에 내려놓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한국생활은 말 그대로 삶의 도전이었다. 한국에서 생활해 가려면 우선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한국인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고 한국사회에 융합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나는 부지런히 한국인들의 만남을 이어갔다.

이주여성단체인 사단법인 <조각보>의 중국대표로 5년간 활약하면서 해마다 진행되는 6.25전쟁기념 사람 책 활동에서 중국인들이 알고 있는 6.25전쟁이야기를 한국인들에게 들려주었으며 <다시 만난 코리안 여성들의 삶이야기>의 사회자로 3년간 활동하면서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등 다른 나라 여성들의 삶과 그 나라의 역사를 점차 알게 되었다.

2016년에는 동북아평화연대와 손잡고 <동포 모니터링단>을 구성하고 단장직무를 짊어지고 한국사회에서 중국동포에 대한 의미지 개선을 위해 ‘중국동포 참 고맙습니다’는 캠페인을 몇 달간 진행하였다.

한국은 이미 내 삶의 터전이 되였고 고향은 명절 때 가끔씩 생각나는 추억이 되었다. 중국에서 방송밖에 모르던 나에게 한국은 인생의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한국생활이 비록 힘들고 고달팠지만 작가인 나에게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영감과 기회를 주었다. 이제 나의 목표는 그동안 한국에서 발표한 수필들을 골라 한권의 책으로 출판하여 외국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고 내 자신에게도 충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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