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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수상작 ]

(특선)이기호_땡큐 코리아 괜찮아 파트너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7-04-28 (금) 01:03 조회 : 574

“괜찮아, 괜찮아”

의정부외국인력지원센터 이 기 호

저는 의정부외국인력지원센터 상담통역팀에서 2007년 6월부터 현재까지 외국인들의 법률문제를 상담하고 있습니다. 벌써 센터 상담통역팀에서 상담을 한 시간이 10년이 되어 갑니다. 10년의 세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상담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우즈베키스탄 파르다씨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센터 개소식 준비로 한창 바쁜 2007년 7월이었습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중 8층에서 떨어져 전신마비로 식물인간이 된 그는 욕창이 매우 심했고 잘 먹지 못해 몸이 말라 있었습니다. 간병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파르다씨의 부인인 카밀라씨가 한국에 입국할 수 있도록 관련 절차를 어렵게 진행했습니다. 부인 카밀라씨의 비자 발급을 위해 그 당시 의정부출입국관리사무소를 수차례 방문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법무부 장관님께 탄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장관님은 파르다씨의 사정이 딱한 것을 감안하셔서 카밀라씨가 입국하여 간병을 할 수 있도록 체류자격을 발급하여 주셨습니다.
 
처음 한국에 입국한 그녀가 남편을 보고 우는 모습, 남편을 살리고자 헌신했던 노력, 한국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활짝 웃던 미소가 아직도 제 마음에 여러 감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카밀라씨는 남편 곁을 지키면서 가슴 아프지만 행복한 간병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2008년 초 의사 선생님은 파르다씨가 언제든지 사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계속되는 투병으로 혈압, 욕창, 호흡 등 건강상의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 간 밤잠도 못자며 고생했던 카밀라씨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럽도록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파르다씨에게 알려 주지 않았지만 자신의 상태를 알았는지 제게 죽기 전 딸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누워있는 파르다씨에게 저는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파르다씨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눈물을 흘리며 잘 움직이기 어려운 손으로 제 손을 잡던 그 날, 저는 병원을 나오면서 울었습니다.

저는 그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고자 우즈베키스탄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과 접촉하였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뒤 세 명의 딸 중 2명이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딸들이 병원으로 가서 파르다씨를 만났을 때 아직 아버지의 상대를 모르기에 의외로 담담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실에 있던 주위의 한국 사람들은 눈물 바다였습니다. 딸들과 함께 해서 그런지 그는 행복해 하며 3개월 동안 힘들고 어렵지만 생명을 이어 갔습니다. 가족들도 조금은 여유 있게 간병을 하며 그들이 함께 있는 것에 감사해 했습니다. 특히 딸들은 아버지를 간병을 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매우 감사해 했고 간간히 한국관광을 하면서 한국사회와 제도, 문화 등에 감탄하였습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났습니다. 3개월이 지나 딸들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갔고 그의 몸 상태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딸들이 떠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결국 사망했습니다. 그 날 저녁 부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남편이 중환자실로 옮겨졌으니 병원으로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혼자 남편의 상태를 보고 나온 그녀의 눈에는 한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부인을 남겨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전화로 파르다씨가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전 다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한없이 슬퍼하는 부인을 보며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기에 같이 울며 부인을 위로하였습니다. 그 날은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 저의 첫 번째 내담자가 하늘나라로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저는 파르다씨의 사망에 관련한 행정절차와 산재법상의 보상을 받는 문제를 놓고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은 남편의 시신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출국하였습니다. 부인이 갈 때까지 남편의 죽음에 긴 한숨을 쉬는 모습을 지켜본 저로서는 안타까운 마음뿐이었습니다. 부인이 가던 날 “선생님,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괜찮다’라는 말은 고맙다는 표현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저도 부인에게 “카밀라씨, 괜찮아, 괜찮아.”로 화답하였습니다. 그렇게 출국한 후 다음날 잘 도착했다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매우 고맙다는 말을 전해왔습니다. 평생 잊지 못 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딸들과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는데 몇 년 전에 딸들 중 2명이 시집을 갔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이 글을 쓰며 잘 지내냐고 이메일로 편지나 남겨 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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