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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수상작 ]

(특선)신병선_오늘도 꿈은 자라고 있다

글쓴이 : togetherday 날짜 : 2017-04-28 (금) 01:03 조회 : 600

<오늘도 꿈은 자라고 있다.>



신병선


  아, 젊고 예뻤구나. 28살, 나의 작은엄마. 사진 속 작은엄마는 화사했다. 베트남에서 홀로 우리 곁으로 흘러들어와 가족이 된 세월이 어느덧 12년이 지났다. 자신의 고향에선 도시에 살며 미용사였다는 작은엄마는 현실에 밀려 농사일을 하시는 시부모님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우리 가족은 말 그대로 대가족이다. 아버지 형제들만 8남매, 나에겐 큰어머니 큰아버지는 네 분, 고모와 고모부 그리고 작은아빠와 작은어머니 각 두 분씩, 큰 사촌언니 큰오빠들하고 나이 차가 크게 나면 17살 차이는 기본이다. 명절 때는 물론 우리 가족들은 한 달에 한 두 번씩 의무적으로 만난다. 이렇게 서른 명 넘는 가족들은 낯선 나라로 시집 오신 작은엄마를 나름대로 배려를 했다. 시골집에 작은엄마가 좋아하는 색에 맞춰 새 가구를 들여 놓으며 신혼 방을 꾸몄다. 우리의 자극적인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을까봐 망고와 같은 열대 과일을 한 박스씩 사놓기도 했다. 그저 우리 가족은 마흔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작은아빠가 남들처럼 평범히 행복하게 살길 바랐기에 그 누구도 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냥 두 분의 집에 사랑 냄새로 수북하길 바랄 뿐이었다.
  우리는 찬찬히 기다리면 베트남에서 온 작은엄마가 우리 가족 문화에 저절로 녹아 들 것이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의 크나큰 착각이었고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걸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끼리도 한 가족이 되면 습관이 달라 다투는 일이 많다고 하는데 국적과 언어, 문화가 다른데 작은엄마와의 관계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우린 이렇게 서로를 몰랐을까
  “아가야, 매워도 김치 좀 먹어봐라. 이게 얼마나 몸에 좋은지 아니?”
  한국말이 서툴러 대화가 통하지 않는 작은엄마에게 할머니는 행동으로 애정 표시를 하셨다. 매일 같이 밥 위에 새빨간 김치 한 조각을 올려주곤 하셨던 것이다. 그때마다 작은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김치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장아찌무침, 깻잎 무침 등 각종 짭짜름한 반찬들을 작은엄마 밥 위에 얹어 주곤 하셨다. 작은엄마는 처음에는 조금씩 드셨지만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할머니는 작은엄마가 한국 음식에 적응을 못한다는 걸 눈치 채시고 간이 세지 않게 소고기 무국을 끓이시곤 했다. 베트남 쌀국수처럼 잔치국수를 만들어 향신료를 뿌리곤 하셨다. 그럼에도 작은엄마는 몇 수저 뜨지 못하고 이내 혼자 방으로 들어가셨다. 그러한 작은엄마의 행동이 내심 괘씸하셨던 할머니는 결국 설날에 큰소리를 내고 마셨다.
  “그래. 먹기 싫음 먹지 마!”
  작은엄마는 그날 이후로 우리와 함께 식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밥을 다 먹고 난 뒤에야 홀로 부엌에 가셨다. 당시 어렸던 내 눈엔 거실에 비춰진 작은엄마의 그림자는 벽에 기대어 부르르 외로움을 떨치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흘러 중학생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겨울 방학에 나는 작은엄마 집에서 며칠을 보냈다. 나와 친척 언니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작은엄마는 우리 옆에 엎드려 노트북을 펴고 무엇인가를 재미있게 보고 계셨다. 호기심에 텔레비전에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처음 듣는 언어,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가득한 화면이 보였다. 스피커에서 낯선 언어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밑에 한글 자막도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이때 내 고막은 앓는 소리를 내기 바빴다. 우리끼리 옹기종기 거실에 모여 텔레비전을 보며 수다를 떨었을 때 왜 작은엄마가 조용히 자기 방에 왜 들어갔는지  조금은 헤아려 봤던 계기가 되었다.
  작은엄마는 조카인 내가 자신의 집에 처음 놀러왔다며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셨다. 그날 나는 작은엄마의 고향 친구들과 첫 만남을 가졌다. 이날 나는 작은엄마의 웃음소리가 방안에 한가득 울려 퍼질 만큼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냥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 내가 저녁 식사엔 베트남 전통 음식을 한번 먹고 싶다며 입방정을 떨었다. 작은엄마는 정말 괜찮겠냐며 걱정을 하면서도 입가엔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식탁 위에는 처음 보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머릿속을 찌르는 향신료 냄새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연속으로 롤러코스터를 수백 번 탄 것 같았다. 내가 밥만 깨작깨작 먹고 있자 작은엄마는 왜 많이 안 먹냐며 계속 난생 처음 보는 반찬을 밥 위에 올려주셨다.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눈을 감고 혀에 물려 있는 음식들을 꾸역꾸역 식도로 넘겨 보냈다. 그제야 작은엄마가 할머니가 준 음식을 왜 한사코 거절을 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입에 안 맞는 음식이 이렇게 한숨만 나올 수 있다는 걸 내 뱃속이 까무러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성인이 된 지금, 낯선 땅에 정착해 우리와 엉겨 붙어 사는 작은엄마가 정말 대단해보인다. 제사 문화를 존중해주며 큰엄마들과 할머니 사이에서 명절 음식을 하는 것을 하나씩 배워가는 그 모습이 정말 어여쁘지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작은엄마는 시집을 오시고 몇 년 전부터 계속 우리와 대화를 하기 위해 한국어 어학원을 다니며 틈틈이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작은엄마의 노력 덕분에 우리들의 사이는 가래떡처럼 하나가 되어 양쪽으로 쭉 늘어나는 융통성이 생겼다.
  작은엄마가 우리 친인척들을 편하게 생각한다고 느꼈을 때는 동민이를 임신을 하셨을 때였다. 결혼 생활 9년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아 작은엄마가 많이 힘들어 했던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했다. 겨울이 될 때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셨던 작은엄마는 자궁이 정말 연약했다. 그 약하디 약한 곳에서 아기의 맥박이 뛰자 우리 모두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가진 아기는 작은엄마처럼 여렸다. 아기가 물컹 자궁 속을 빠져나오려고 하자 작은엄마는 몇 개월 동안 순천향대학병원에 입원을 하셨다. 일을 하느냐 바쁜 작은아빠를 대신해 우리 모두는 작은엄마가 드시고 싶다는 치킨, 가래떡, 애플망고 등을 사가기고 했고 수육, 군고구마, 잡채 등은 직접 음식을 해 병실에 가져가기도 했다. 어느 날은 작은엄마 병실에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전화를 받고 사촌들과 함께 바로 선풍기를 들고 작은엄마를 찾아가기도 했다. 최대한 작은엄마의 친정엄마의 빈자리를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챙기려고 했다. 임신했을 때 제일 보고 싶은 사람이 친정 엄마라고 한다. 어른들이 한 푼 한 푼 모은 선물을 작은아빠한테 보태 산후조리는 작은엄마의 친정어머니에게 맡길 수 있었다. 아이는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건강하게 성장했다.
  작은아빠의 눈을 닮고 작은엄마의 코를 닮은 동민이는 우리 집안의 늦둥이 사촌 동생이다. 우리 가족의 소망을 긴 시간이 걸려 만난 만큼 따스한 햇볕만을 받아먹으며 알찬 열매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올해 세 살이 되는 동민이는 겨울에 자신의 외갓집에 놀러갔다 왔다. 난생 처음 보는 가재랑 사진도 찍고 한국에서 맘껏 먹어보지 못했던 망고와 코코넛 같은 열대 과일의 단물을 작은 이로 핥아 먹었다고 한다. 또한 시골에서 지냈을 때 집 근처에 아기들 옷가게가 없어 우리가 선물해 준 옷만 입혔는데 베트남에 갔을 때 반팔과 얇은 내복 등을 가방 안에 넣고 끌고 오셨다고 한다. 베트남을 밝히는 햇빛이 우스스 떨어진 자리를 동민이는 기억할까? 자신의 또 다른 고향 냄새를 먼 훗날에도 잊지 않길 바랐다. 베트남에서 삼 개월을 보낸 동민이는 검은색 진주를 피부에 품고 돌아왔다.
  내 막내 사촌 동생, 동민아 어서 자라 베트남과 한국의 허공을 이어주는 둥근 곡선이 되어줘. 우리는 네가 커가면서 우리가 준 사랑보다 모자른 사람들이 너를 향해 비양하는 말들이 벌써부터 걱정이 돼. 그런 말들을 네 귓가에 영영 들리지 않게 잘게 부셔 이 세상에서 소멸시키고 싶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까지도 동남아 혼혈아에 대한 편견이 존재해. 이런 그늘을 펑하고 터트릴 수 있게 우리가 늘 뒤에서 지켜줄게. 잘만 자라줘. 막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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