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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_맑은 날과 흐린 날, 그리고 행복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5-03-26 (목) 22:34 조회 : 1303

 

맑은 날과 흐린 날, 그리고 행복 - 이정미​

 

   4월. 예전 같으면 완연한 봄이건만 지금은 예전과 같이 않고 날씨가 변화무쌍합니다.
 한국으로 온 외국인주민이 100만 명이라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145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들에 대한 정책들도 많이 변화했습니다.
   외국인들과 함께 해 온지 13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들과 함께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지나 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2000년 9월 37살의 나이로 결혼하면서 6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김포의 안옹주물로 들어갔습니다. 마을 어귀의 천막으로 지어 진 영세사업체에는 외국인근로자들이 근무하면서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몽골인 부부의 7살 된 어쭈파일, 5살인 잉겔라를 만나면서 저는 처음으로 외국인근로자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결혼이민자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지금까지 이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몽골인 부부가 일을 하는 동안 방치된 두 아이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마음이 너무 아팠기에 이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부모인 몽골인들과 친해지고 외국인들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리감보다는 친근함이 더하여졌습니다.

   2006년 5월 초 어느 날 빵을 사 가지고 걸어오다 천막 공장 앞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스리랑카인 두 명을 보게 되어 빵을 나누어주고 저의 집을 알려주면서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하였습니다. 2주 후 이들은 친구가 방을 얻고 있는데 도와 달라고 찾아왔고 방을 얻는데 도움을 주고 집들이에 초청되면서 집들이에 온 스리랑카인 11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들은 도움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올 수 있고 이들의 컨테이너에 언제든지 가서 같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이웃사촌이 되었습니다.
 
   2007년 저는 이렇게 7개국 100여 명의 이웃사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저의 집은 센터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고 결혼이주여성들도 알게 되어 2007년 6월 김포다문화가정지원센터를 개소하게 되었습니다. 친구에 친구를 소개하여 많은 결혼이민자를 만나게 되어 이들의 요구로 2010년 김포 통진으로 센터를 이전하였습니다. 통진의 한 구석 시골집을 빌려 본격적으로 센터를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

   이맘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흐린 날의 추억입니다. 2010년 통진으로 센터를 옮겨 오면서 만난 한국 나이로 21살인 필리핀의 어린 신부 R을 만난 일이었습니다. R을 처음 만났을 때 임신 5개월의 부른 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낳기 2주 전까지 열심히 센터에 한국어를 공부하러 왔습니다. 그녀의 시어머니도 만났습니다. 제가 뵙기에는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8월에 R은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아기를 낳고 1달 후인 9월부터 갓난아기를 데리고 공부를 하러 계속 왔습니다. 10월의 어느 날부터 R의 안색이 안 좋아 보였습니다. 물어보았습니다. 무슨 근심이 있는지를. R이 한국말은 잘 하지 못하기에 저의 짧은 영어 실력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R도 울고 저도 울었습니다.
   왜냐고요?
   자기는 남편이랑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이혼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연인즉, R로 인하여 시어머니와 시누가 남편과 자주 싸운다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시누는 이제 한국에 온지 1년도 안 된 R에게 한국 문화만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아기를 낳고는 꼭 미역국만 먹어야 한다고 강제로 미역국을 먹였답니다. R은 미끄러운 미역국, 낮선 미역국이,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미역국이 너무나도 싫었답니다. 그로 시작하여 계속 되는 시어머님과의 트러블과 가족 간의 마찰로, 남편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이들은 결국 이혼을 하였습니다. R에게 딸의 양육권과 필리핀에 집과 돈을 주기로 하고 말입니다. 어쩜 이럴 수가 있지요? 그 후 R이 이혼 한 것은 알았지만 필리핀에 갔는지 한국에 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걱정이 되었지만 센터에서 다른 이들을 만나면서 R의 일은 차츰 잊어졌습니다.
   저는 이때의 경험으로 한국 분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문화 인식 개선을 위하여 우리 결혼이민자들과 학교나, 어린이집에서 요청하거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다문화 인식 개선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센터에는 결혼이민자, 외국인근로자, 난민, 중도입국자녀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있습니다. 많은 결혼이민자들이 상담을 해옵니다.

   2011년 7월 무더운 어느 날 한 베트남 주부가 집을 나왔답니다. 그 주부의 친구가 도와 달라고 부탁을 해 왔습니다.
   이 주부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주부는 결혼을 하고 아이가 4명이나 됩니다. 남편의 월급이 잘 나오지 않아 임대아파트 방 2칸짜리에 사시는 시어머님 댁에서 생활을 하면서 쥐꼬리만 한 남편의 월급으로 시어머님과 모두 7식구가 살고 있는데 알코올 중독자인 시 아주버님이 함께 사시게 되면서 불화가 생긴 것입니다. 시 아주버님은 매일 술을 드시면서 제수씨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시고 심지어 폭행을 일삼는다고 합니다. 주부는 남편에게 분가를 요구했고 남편은 분가할 돈이 없어서 분가를 할 수 없으니 아이들이랑 집에서 나가라고 했답니다. 아내인 베트남 주부는 집을 나오기로 결심하였고 집을 나와 아이들과 살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센터에 온 것이었습니다. 
   남편을 불러서 센터에서 만났는데 부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 같았습니다. 저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데 아내는 지금 당장 집을 얻어서 나오고 절대로 집에 안 들어간다고 하고 남편은 돈이 없어 방을 얻을 수 없다고 고집이었습니다. 저는 돈이 없어 방을 얻지 못하는 남편보다는 아내인 베트남 주부를 설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딱 3개월만 참으라고, 남편은 그동안 집을 알아보라고, 저도 돕겠다고 말입니다. 설득 된 아내는 집으로 들어가고 3개월 후 작은 원룸을 얻어서 이들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분가를 하였습니다. 요즈음에도 장날이면 종종 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는 부부와 웃으면서 마주칩니다. 그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노라면 힘들었던 일들은 잊어지고 저도 행복해 집니다.

   2011년 10월에는 부천에 위치 한 한 파출소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태국인 결혼이주여성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와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파출소는 재워 줄 곳이 없다면서요. 밤 12시 쯤 전화를 받고 그 곳에 도착하니 새벽 1시가 조금 못되었습니다.
   주부는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파출소에 있고 남편은 없었습니다. 남편을 불렀더니 남편이 성을 내면서 오고 그 뒤를 따라 시어머니께서 오셨습니다.
   이들의 사연은 아내와 남편은 태국에서 만났습니다. 연애결혼입니다. 남편이 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만나 결혼했고 태국에서 사치를 하면서 살다가 사업이 실패하여 한국의 부모님 댁에 얹혀살게 되었답니다. 아내는 마음대로 돈을 쓰지 못하고 시어머님에 대한 스트레스로 못 살겠고, 남편은 고부간에 치여서 못 살겠답니다. 도대체 시어머니는 왜 못 살겠다고 하는지 들어 보았습니다. 시어머니는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쉰밥을 버리지 않으시고 물에 씻어서 드신답니다. 그런데 이 며느리 음식 아까운줄 모르고 버린 다는 것이지요.
   서로 간의 문화의 차이였습니다.
   이 태국 주부 어머니 계신 집에 안 들어가겠답니다. 남편도 아내랑은 안 산다고 하고요. 할 수 없이 저희 센터로 아내를 데리고 오기로 하고 보니 아이의 분유가 집에 있답니다. 남편에게 전화로 분유를 가져다 달라고 하고 어머니 안 계신 곳, 차에서 2시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부부가 함께 센터로 왔습니다. 함께 대화를 나누고 새벽 5시에 부부는 사랑을 되찾았습니다. 헤어지지 않기로 한 것이지요. 센터를 나서서 집으로 가는 두 사람, 아니 아들까지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힘든 하루 밤이었지만 그 보다 몇 배나 힘이 되고 기쁜 밤이었습니다.
 
   2012년 5월, 매우 따뜻한 날입니다. 제가 드디어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5일장이 열리는 날입니다. 길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습니다. 그 동안 센터 유치부에서 공부를 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연선이와 그 엄마였습니다. 연선이 엄마는 중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을 와서 고생도 많이 하고 이제는 임대 아파트에서 조금은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연선이는 예쁜 분홍색 원피스에 꽃분홍색 머리핀을 머리에 꼽고 있었습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 춘녀 씨, 안녕하세요? 연선아 안녕? 어디에 가시는 길이에요?”
  “ 네, 소장님 연선이가 할머니 댁에 가자고 성화라서 가는 길이에요.”
   순간 친할머니는 안 계시고 외할머니는 중국에 계시는데 비닐봉지 하나만 달랑 들고, 그 것도 김이 모락 나는 삶은 찰옥수수를 비닐봉지에 넣어 할머니 댁에 간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 잘 다녀오세요, 연선 씨.”
  “ 소장님, 지금 어디 가세요? 센터에 안 가시고”
  “ 네, 장 좀 보려고요.”
  “ 언제 센터에 들어가세요?”
  “ 조금 있다 들어 갈건대요?”
  “ 빨리 들어가세요.”
  “ 왜요? 무슨 일이 있어요?”
  “ 센터 문이 열려야 들어가지요.”
  “ 할머니 댁에 가신다면서요?”
  “ 에이, 소장님도 소장님께서 할머니지 누가 할머니예요? 연선이가 센터를 할머니      집이라고 하는걸요. 할머니 보고 싶다고 해서 소장님 좋아하시는 옥수수 사서 뵈러     가는 길이에요.”
    우리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이 저를 할머니라 부른답니다. 그러면서 우리 주부들, 친정엄마가 저라고 하네요.
    전 이날 또 한명의 딸과 손녀가 생겼습니다. 오늘은 참으로 맑은 날입니다. 그리고 많이많이 행복한 날입니다.

   센터에는 많은 결혼이주민과 외국인근로자들이 낮선 이곳 한국에 살면서 가족 간에 힘들어서, 월급 때문에, 환경에 지쳐서 상담을 해 옵니다. 상담 중에 어떨 때는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이들이 문제가 해결되고 환하게 짓는 미소에 저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흐린 날이 있지만, 이 흐린 날이 맑은 날이 되는 날 저는 너무나 행복하답니다.
   결혼 13년, 저에게는 나라도 피부색도 다른 여동생과 딸들이 아주 많습니다. 또한 생면부지인 김포에 외국인 이웃사촌도 많습니다. 이 곳 김포에서 모두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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